리추얼스토리-4
대학 교양 과목 중에 철학을 수강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어느 날의 강의의 풍경이 아직도 희미한 안개처럼 남아 있습니다.
교수님은 문득 수업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인 양,
느릿하게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은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되었을 때, 주말마다 찾아가는 종교를 하나쯤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저는 어떤 특정 종교의 신자는 아니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에 담긴 미묘한 의미를
어렴풋이 더듬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신이 따뜻한 눈길로 나를 돌보고 있다는
일차적인 안도감 외에도
다른 이유들이 강력하게 작용해서 아닌가 합니다.
정기적으로 비슷한 얼굴들과 마주하고,
그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이름 모를 불안들을 해소하고,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어딘가에서 작게나마 들려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삶의 한 조각을 단단하게 붙잡아주는 닻 역할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굳이 그 장소가 특정한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핵가족을 넘어 '핵개인화', 심지어 '초개인주의'로 치닫는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연스레 존재했던 수많은 공동체들이 희미해지고 그 숫자마저 현저히 줄어든 지금. 관계의 의미는 전에 없이 새롭고 낯선 얼굴을 하고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고립의 시대에,
'리추얼'이라는 것은 '연결'이라는 오래된 단어를 다시금 소환하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비단 타인과의 눈에 보이는 연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흐릿해진 거울 속의 자신과 마주하는 연결일 수도 있고,
도시의 익명 속에서 스치는 수많은 이들과의 간접적인 연결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더 나아가 차가운 아스팔트 사이로 비집고 피어나는 이름 모를 풀과의 연결,
아니면 저 멀리 가닿지 못할 초월적 존재와의 아득한 연결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 또한,
제게는 어떤 종류의 소중한 리추얼입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 이 활자들을 읽어주고 있다는
어렴풋한 인상만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종류의 기쁨이 샘솟기 때문입니다.
에세이라는 장르에 유독 마음이 이끌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릅니다.
타인의 사적인 고백을 읽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듯한
희미한 연결감을 맛보는 것.
오늘도, 이 아득한 연결의 방식에
기꺼이 동참해주신 당신께 감사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