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추얼스토리-76
영화감독은 하루를 넘어 한 달, 일 년, 몇십 년까지도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영감을 무작정 기다리는 게 아니라 흐름을 만들고, 구조를 세우고, 그 안에 생각이 차오를 수 있도록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준비합니다.
<다크나이트>, <인셉션>, <인터스텔라>, <오펜하이머> 등 대중과 평단의 고른 호평을 받으며 작품성과 대중성,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감독은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아이디어가 흐트러진다는 이유로 스마트폰 대신 작은 선불폰을 사용하며, 이메일도 쓰지 않고 유선 전화로 대화하기를 선호한다고 말했습니다. 제작진 및 배우들에게 각본을 보여줄 때조차 이메일보단 직접 만나서 주는 것과 같이 전달하는 방법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놀란 감독은 “나는 주의가 쉽게 산만해지기 때문에 지루할 때마다 인터넷에 접속하고 싶지 않다”고 하며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은 컴퓨터로 영화 대본을 쓴다고 밝혔습니다. 이 같은 성향이 영화를 만들 때도 이어져서, 디지털에 밀려 더 이상 쓰지 않게 된 거나 다름없는 필름으로 영화 전체를 찍어내는 몇 안 되는 감독이기도 합니다.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달성한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 봉준호 감독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양의 글을 쓰고, 아이디어를 기록합니다. 20여 년 전 그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시나리오(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쓴 각본)를 쓰기 위해 바다가 내다보이는 한적한 도시로 갔습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면 일필휘지로 작품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얼마 쓰지도 못하고 몇 달 만에 서울로 돌아오고서 집과 가까운 카페를 돌아다니며 글을 쓰는 작업 스타일이 생겼습니다. 카페의 기분 좋은 소음, 그리고 타인과의 적절한 교류 속에서 영감이 솟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봉준호 감독은 이 때부터 구석진 곳에 있는 조용한 카페를 하루에 세 군데 정도 다니며 대부분의 시나리오를 썼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이디어를 기다리지 않고, 흐름이 생길 수 있도록 하루의 구조를 먼저 설계하는 리추얼은 우리도 따라 하기 그리 어렵지는 않아 보입니다. 저에게도 4년 정도 누적해서 쓴 다이어리 한 권이 있습니다. 이 노트를 들고 집 앞 조용한 카페에 가서 작은 장면 하나라도 기록할 때면 진정으로 저와 연결되는 기분이 듭니다. 이러한 작은 설계들이 결국 큰 창작을 만들어 간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