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서 킥을 날리다

치앙마이가 나를 바꿔놓은 것

by 유영

나는 정말이지 폭력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얼마나 싫어하느냐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누군가 치고받고 싸우는 장면이 나오면 고개를 돌려버린다. 맞는 사람의 표정을 보는 것도 괴롭고 특히 맞은 부위에서 피라도 나오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영화적 드라마적 연출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에서 레슬링, UFC, 복싱 이런 스포츠 단어들은 전혀 존재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선수가 세계 유명 대회에 출전한다고 온갖 미디어에서, SNS에서 난리일 때에도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치앙마이에서 무에타이를 배웠다.




처음 치앙마이에 왔을 때 소위 말하는 유명 관광지는 대부분 다녀왔다. 올드타운 안에 있는 각종 사원들, 도이수텝, 그리고 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도이인타논 국립공원까지.



두 번째 치앙마이에 방문한 첫날 아침, 산책을 하다가 근처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오늘은 뭘 하지?' 하며 검색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일주일 일정. 작년에 같던 곳, 했던 거 말고 말고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단어, '무에타이'. 한국이었다면 절대 눈길조차 주지 않을 단어였다.



'무에타이? 태국 전통 운동? 태국 현지에서 배우는 태국 전통 운동?'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에타이를 배우는 나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한국이 아닌 치앙마이에서 현지인에게 직접 배우는 경험이라 그런 걸 지도 모르겠다. 곧바로 근처에 무에타이 체육관이 있는지 찾아봤다.



그런데 웬걸?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 고작 걸어서 5분 거리에 체육관이 있었다. 이런 우연이. 게다가 이미 다녀간 한국 여성분의 리뷰도 괜찮았다. 치앙마이에 있는 여러 체육관을 가봤지만 대부분 글러브 관리가 엉망이라 땀 냄새가 심했는데 이곳은 깔끔하게 관리가 잘 되어 있다고 했다. 거리도 가깝고, 평도 괜찮고. 흥미가 점점 더 커졌다.



수업은 1시간 30분씩 하루에 총 다섯 번 진행이 되며 원하는 시간에 라인이나 와츠앱으로 사전 예약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원데이 클래스처럼 딱 하루만 들어도 상관없었다. 바로 체육관에 연락을 했고 오후 4시 45분 수업을 예약했다.




체육관은 완전 오픈된 형태라 지나가면서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태국 특유의 후끈한 공기 속에서 커다란 선풍기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바닥에는 땀방울이 번들거렸다.




왼쪽에는 샌드백들이 주욱 걸려 있고, 오른쪽에는 스파링 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네 분 정도 계셨는데 링에서는 한 쌍의 파트너가 연습 중이었다.



수업에는 나 말고도 다섯 명 정도가 있었다. 오래 무에타이를 배운 사람도 있었고 나처럼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 옆에 있던 내 또래의 중국 여자는 치앙마이에 머무는 한 달 동안 무에타이를 배울 거라고 했다. 본인 전용 글러브까지 직접 챙겨 다니는, 꽤나 진심인 사람이었다.



무에타이를 처음 배우냐는 관장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1:1로 기본 동작을 빠르게 알려주셨다.



"원(쨉). 투. 훅. 어퍼컷. 킥"



왼다리를 앞으로 오른 다리를 뒤로. 다리 사이 간격은 너무 멀지 않게. 무릎을 약간 굽혀 기본자세를 잡는다. "원" 하면 왼팔을 뻗고 반대 손은 얼굴을 가린다. "투"하면 오른팔을 뻗는다. "원투"하면 왼팔 오른팔을 번걸아가며 빠르게 뻗는다. 옆으로 돌려지는 훅, 아래에서 올려치는 어퍼컷, 마지막으로 다리를 차는 킥까지. 설명을 들으면서 동작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재밌겠는데?'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실전에 들어가기 전 5분간 줄넘기를 한다. 체육관에서 줄넘기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필라테스를 배우고 있던 나는 한 번도 상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도 살짝 들었다. 몇 번 뛰지 않았는데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필라테스랑 비교하면 줄넘기는 매우 큰 유산소 운동이었다. 몇 번 뛰다 멈추고 또 뛰다 헉헉 거리며 쉬기를 반복했다.



줄넘기를 하면서 어느 정도 열을 올린 다음 본격적인 훈련.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훅훅 치면서 감을 익힌다. 첫 미션은 원투 100번 하기.


"원투 원투 원투 원투"


그리고 이어지는 1:1 훈련.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동작을 취한다. 이제는 샌드백이 아니라 진짜 사람을 상대로 한다. 아, 물론 무에타이 패드를 장착한 선생님이 바로 그 상대다.



선생님이 구령을 외친다. "원!" 하면 왼팔. "투!" 하면 오른팔. "원투 원투!" 하면 원투를 두 번 반복. "원투 원투 원투 원투 원투!" 하면? 다섯 번 반복. 점점 동작이 익숙해질수록 내 몸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힘을 쏟아낼수록 더 몰입되었다. 그리고 가장 재밌는 순간이 찾아왔다. 바로 킥.



나는 너무 몰입한 나머지 저절로 '악악' 소리를 냈다. 힘을 쥐어짜듯 발을 뻗으며 내뱉는 소리. 그 모습을 본 선생님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더 강하게 차 보라고 했다. 나도 모르게 점점 더 힘을 실어 찼고, 패드에 부딪히는 강렬한 충격이 온몸을 휘감았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흥분이 온몸을 타고 퍼졌다. 발이 패드를 제대로 가격해 '팡'하고 소리가 날 때마다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몇 번 차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10번을 연속으로 찼는데 온몸이 휘청 거린다. 30초 걸렸을까? 1분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체력이 미친 듯이 소모된다.



TV에서 UFC 선수들이 경기를 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면 '고작 3분 경기하면서 왜 저렇게 힘들어할까?' 생각했었다. 상대방을 때릴 타이밍을 노리면서 중간중간 쉬는 것 같기도 한데 말이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이 운동은 엄청난 체력을 요한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마무리 운동을 마치고 나니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힘든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벅찬 숨을 몰아쉬면서도 어딘가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계속 '악악' 소리를 내며 치다 보니,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심장은 쿵쿵 울렸다. 분명 몸은 한계에 다다랐는데,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이게 뭐지?'



너무 힘들어서 주저앉을 것 같은데, 동시에 짜릿했다. 온몸이 지쳐가면서도 더 해보고 싶은, 묘한 중독성이 느껴졌다. 몸은 녹초가 됐지만 머릿속은 맑아졌다.



‘이거, 계속하고 싶다.’



처음에는 '하루만 해보자'라고 했던 것이 어느새 하루라도 빠지면 아쉬운 루틴이 되었고, 치앙마이에 머무는 7일 동안 5일을 체육관에 출석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무지 힘들었던 줄넘기가 다음 날은 좀 편해지고 그다음 날은 좀 더 편해졌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킥복싱 학원을 등록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무려 무에타이 경기를 보러 가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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