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란다는 것
아이를 키우며 겪는 괴로움 중엔 취향의 박탈도 있을 것이다.
몰딩, 벽지, 가구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펴 인테리어를 꾸몄다가 아이가 태어난 후 매트를 깔고 요란한 색상의 장난감들을 늘어놔야 한다든지, 클래식과 재즈를 즐겨 듣다가 동요와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무한반복 플레이해야 한다든지, 서스펜스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데 [달님 안녕]을 하루에 백 번 읽어야 한다든지 하는 상황이 육아 기간 내내 이어진다.
어떨 땐 인간관계도 바뀐다. 취향이 찰떡인 친구들은 만나기 어려워지고 아이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에서 만난 양육자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취향이 맞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땐 종종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난감한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런 시간이 충분히 지나고 나니 아이를 중심으로 했던 인간관계 속에서도 내 인연이 생기더라.
어렸을 때는 인간의 발달과정과 미디어의 유행을 따랐던 아이의 취향도 점점 확실한 개성을 띄게 된다. 공룡, 로보카 폴리, 터닝메카드 등 대세 속에서 즐거움을 찾던 아이의 흥미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약간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취향을 넓힐 기회를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이의 학교 도서관은 제법 크고 좋은 시설을 갖추어서 긴 시간을 거기서 보냈는데 스스로 자유롭게 골라 읽으면서부터는 환타지 소설에 깊이 빠졌다. 4학년 무렵부터는 히어로 영화, 마블 시리즈에 열광했다. 마블 문제지를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시험을 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스파이더맨>의 OST 중 맘보 풍 노래가 귀에 꽂혔나 보다. 맘보 음악에 하트 꾹을 누르고 비슷한 음악이 들릴 때마다 모아 두었다.
학교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고 와서는 도레미송을 시작해 OST를 잔뜩 듣는다. 나도 함께 듣다 보니 줄리 앤드류스 목소리가 무지무지 깨끗하고 발음이 정확하고 기분 좋은 음색이라 생각난 김에 <메리 포핀스> 옛날 영화를 보여주었다. 첨단 CG에 익숙한 아이 눈에 옛 그래픽 효과가 어떨까 싶었는데 그게 재밌다며 까르륵 거리며 끝까지 보더라. 난 졸려서 잤는데 ㅎㅎ
애니메이션 <힐다>는 색감과 묘하게 어두운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고,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그림이 정말 멋지다고 한다. "엄마, 농장 송이랑 비슷한 거 있지 않아?" 하며 비틀스의 <오블라디 오블라다>를 반복 재생하다가 비틀스 노래 중에 해괴한 노래들을 찾아 들으며 희한하다고 좋아한다. <와일드 허니 파이>, <레볼루션 나인> 등은 아이 덕분에 처음 들어봤다.
레고와 마인크래프트를 즐겨서인지 픽셀아트를 좋아한다. 점점이 모여서 특징을 만드는 게 멋지단다. 그 옛날엔 픽셀아트로 캐릭터와 방을 꾸밀 수 있던 <싸이월드>란 것이 있었노라 말하니 무지 부러워하는 얼굴이 되었다. (엣헴 ㅋㅋ) 너무 아쉬워하는 듯해 픽셀아트로 웹툰을 그린 선우 훈 작가의 <나의 살던 고향은>을 보여줬다. 오오~ 하며 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는 자기가 아는 다른 픽셀아트를 찾아서 내게 보여주었다. 뭔가 신기한 느낌이다. 새삼 아이가 자랐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아이와 취향을 나누게 되다니.
"엄마, 난 이렇게 칸을 손으로 그린 느낌이 좋아."
"난 이 그림체가 좋더라. 이렇게 뾰족뾰족한 거. 저번에 본 <클라우스> 애니메이션 그림 같은."
"나 이런 노래가 좋아. 신나는 노래."
"나 이 영화 그래픽이 넘 재밌어. 배경이랑 캐릭터가 그림체가 통일되어 있어."
아이와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게 즐겁다. 물론 나는 잘 모르는 마인크래프트 이야기를 할 때가 대부분이라 힘든 시간이 더 길긴 하다.
아마도 이건 아주 짧은 시기일 테지. 아이는 곧 자신과 취향이 같은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하는 걸 즐기게 될 것이다. 엄마의 취향 따윈 구닥다리나 허영이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래서 지금을 기록해 둔다. 너는 이렇게 자라고 있구나. 키도 자라고 취향도 자라고 있구나.
+ 박탈당한 내 취향을 하나 둘 복구하는 건 네 성장의 시간보다 더 지난한 과정이 될 것 같다. 이젠 네게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그러고 보니 네가 친구네 집에서 봤다며 추천한 <슈퍼 미니> 정말 화면이 멋진 영화였어. 여러분께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