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인생은 흘러가더라

<동호> 8편

민혁의 엄마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동호는 그녀와 약속한 것처럼 민혁이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 주지 못하는 아버지는 되고 싶지 않기에 회사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아이와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되도록이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집으로 가져와 아이 옆에서 함께 밥을 먹고 틈틈이 해결해 갔다. 그런 그의 노력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듯 아이는 쑥쑥 잘 자라 주었다. 때때로 그녀가 옆에 있을 때 왜 그렇게 해 주지 못했는가 후회하며 가슴을 쳐 보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돌아올 수 없었기에 다시 마음을 다독이고는 아이를 향해 웃어주었다.


아이는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건강했다. 잘 뛰었고, 잘 웃었다. 하지만 엄마의 빈자리는 매우 컸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에는 동호가 아무리 잘 씻기고 잘 입힌다고 하지만 그 나이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고 요즘 학교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남자아이는 그저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앉아서 공부를 하기보다는 함께 나가서 공놀이를 하며 뛰어놀았다. 그러다 보니 한글도 늦었고, 공부도 뒤쳐져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럼에도 동호는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민혁에게 감사했고 또 미안했다.


그러던 그에게 눈에 띄는 한 여성이 있었다. 회사에서 외주로 부탁하는 일을 재택으로 해 주는 여성으로 나이는 동호와 비슷했다. 처음에는 깔끔하게 일을 잘해주어 동호가 수월하게 일할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절을 했고, 그 이유는 집에 아이를 혼자 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별한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는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를 위해 프리랜서로 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아직 어리기에 좀 더 클 때까지는 직장생활을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그렇게 동호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그녀의 형편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아이는 여자아이로 아들 민혁이보다 두 살이 많았다. 하지만 꼼꼼한 그녀의 성격을 닮아 공부도 잘하고 집안일도 곧잘 도와준다고 했다. 형편이 비슷하다 보니, 그녀에게 조금 더 신경이 쓰였다. 일부러 거래처에서 외주가 필요하다는 일이 있다면 소개도 해주게 되었고, 그렇게 신경을 써주는 동호에게 그녀 역시 때때로 밑반찬이라도 챙겨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크면서 약간의 시간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동호의 회사에도 조금씩 출근하여 일을 도와주는 일도 생겼고, 가끔은 저녁을 함께 먹는 일도 있었다.


병으로 민혁의 엄마를 떠나보내고 절대로 다시 흐르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의 인생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웃음기 없던 그의 표정은 그녀와 함께 일을 하거나 식사를 하며 조금씩 풀어졌고, 집에서 민혁과 식사를 하며 그녀의 반찬을 집어 올릴 때마다 그의 집에 약하게나마 온기가 퍼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아이는 있지만 새로이 가정을 꾸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에 그리 늦은 나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호는 그녀에게 마음을 전했다.


그렇다고 어릴 적 민혁의 엄마를 만났을 때처럼 마음이 설레거나 그녀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생의 3분의 2 정도 지난 이 시점에 남은 3분의 1 정도는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들도 나름의 의미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동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딱히 거절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 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딸과 동호의 아들 민혁이었다. 그 아이들은 이 조합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러한 망설임은 동호뿐 아니라 그녀 역시 갖고 있었던 것이기에 먼저 용기를 내어 만나보기로 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의 생각도 알 수 있으리라. 혹시 아직 아이들 각자의 마음에 서로의 부모님에 대한 마음의 그리움이 남아 반대를 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과연 민혁은 동호의 선택을 어떻게 생각해 줄까. 동호는 자신의 인생보다 민혁의 인생을 먼저 생각했다. 생이별을 하게 된 그녀가 남겨준 보물 같은 아이. 그런 아이에게 좀 더 나은 생활을 만들어주지 못할 것이라면 자신의 감정 따위는 지워도 된다. 이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더 이상 원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그녀의 딸과 민혁까지 포함한 자리를 만들었다.


사려 깊고 밝아 보이는 그녀의 딸이었다. 그녀의 성격과 얼굴을 그대로 닮은 아이, 연서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예뻤고 똑똑해 보였다. 학교에서도 인기가 많다고 했었던가. 그녀의 자랑거리인 연서는 정말이지 아버지가 없는 그런 그늘은 보이지 않았다. 동호와 함께 하는 자리에서도 그 어떤 모난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매우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자신의 엄마를 신경 써주고 도와줘서 고맙다며 아이 같지 않은 말투를 했다. 그에 비해 아들 민혁은 밥 먹는 내내 얼굴을 들지 못했다. 낯가림도 심했고, 그동안 주변의 친한 아이들도 전부 남자아이여서 그랬는지 젓가락질만 해댔다. 그 아이의 학교 이름을 듣고 더 그랬던 것 같다. 그 아이의 학교는 도내에서도 탑인 학교였고, 그녀에게 얼핏 듣기로 연서는 공부를 꽤나 잘했다. 없는 형편에 학원에 가는 일없이 도서관과 집에서만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공부욕심이 있는 것인지 정말 열심히 한다고 했다. 그런 그 아이에게 주눅이라도 든 것일까.


식사 분위기가 어떠했든 간에 그 자리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부모님의 의견을 존중해 준다고 했다. 그리고 이내 간단한 식사자리로 결혼식을 대신했다.


민혁이가 중3이고, 연서가 고2 때 일이다.


동호는 연서에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워주고 싶었다. 집의 창고로 쓰던 방을 예쁘게 꾸며 주었다. 그런 동호의 마음을 알아준 것인지 연서는 동호에게 자주 미소를 지어 보여주었다. 그제야 멈춰있던 동호의 시계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연서는 민혁이에게도 신경을 써 주었다. 조금씩 말도 걸어주고, 고등학교 공부도 가르쳐 주었다. 공부는 전혀 관심이 없던 민혁이도 대입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 귀여웠고 연서에게 고마웠다. 공부는 못해도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가 봐도 좋지 않은 성적으로 가득한 민혁의 성적표를 볼 때마다 엄마의 빈자리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연서의 말 한마디에 나가서 노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던 민혁의 시간표에 공부를 하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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