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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 테라피스트 깽이 Sep 12. 2023

고양이는 때때로 말썽을 부리지만 화가 나지 않아요

화가 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 방법을 배웠다

우리 집에 흑미가 오고 나서는 부쩍 이슈가 많이 생긴다.


어제는 번역을 한다고 책상에 앉아서 계속해서 컴퓨터만 들여다보았다. 일한다고 밖에 나가있는 시간도 많은 주제에 잠깐 아이들을(온이와 흑미) 만져주고 밥을 주고 나서는 내 일을 보느라 놀이도 못해줬다. 미안하지만 마감이 코 앞으로 다가온 시기이기 때문에 매일 몇 장이라도 해 내야 한다. 적어도 11월 한 달 동안은 온전히 처음부터 끝까지의 글의 흐름을 읽고 편집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워 두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과가 되어버렸다. (일생일대의 첫 생활문 번역입니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는지..)


 <부스럭부스럭 낑낑>


어디선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흑미가 흥분해서 낑낑, 냥냥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흑미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화장실에서도 냥냥 끙끙 거리는 소리를 내는데, 가 보면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화장실 흙을 가지고 놀고 있거나 볼일을 보기에 이번에도 그런 류의 귀여운 소리겠거니 하며 일에 집중했다.


5분 정도 지나 퍼뜩 주위를 둘러보니, 온이만 있을 뿐 흑미는 아직 없었다. 어디서 놀고 있는 거지..?

그때 들려오는 흑미의 끙끙대는 소리... 어디 있는 거지? 화장실 쪽은 아닌데...


흑미의 소리는 베란다 쪽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흑미가 혹시 어딘가 빨랫줄에라도 걸려있나 싶어 저장버튼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발, 두 발..... "꺅!"


흑미는 나와 우리 딸이 화장실에 들어가면 쫓아 들어온다. 아직 훈련이 안돼서 그런 건지, 온이는 "안돼!" 하면 정말 안 들어오는데 흑미는 그렇지 않다. 원래 성격도 똥꼬 발랄하다 보니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

 우리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화장실에 은근히 들어가서 두루마리 휴지 끝에 손을 대서 갈기갈기 찢어 놓은 적도 있다. 그 작은 손이 흑미에게는 아직 높은 휴지까지 닿는 것에 감탄하면서 휴지의 끝이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자고 다짐했다.

이 녀석의 점프력은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하고 있다.

온이 때는 없었던 일이기에 꽤 신성한 충격이었고, 남겨진 휴지가 좀 아깝게 생각했지만 많은 양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은 화장실 앞에 식탁을 놓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함께 식사하는 날이 주말(특히 일요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식탁 위에는 야채 키우는 기계와 물티슈등의 생활용품이 올려져 있고, 그 아래는 흑미와 온이의 두부모래전용 화장실이 있다. 그리고 빈 공간에는 두루마리 휴지를 봉지째 넣어두었다. 여자가 둘이나 있는 우리 집은 두루마리 휴지를 많이 쓰는 편이고, 둘 다 바쁘기에 여분의 휴지를 가지러 어딘가로 가는 것은 쉽지 않기에 그냥 편의로 식탁아래 두었다.


 물론 온이만 있을 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마저도 흑미의 작고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로 찢어발겨지고 두루마리 휴지가 반토막이 된 것을 보고 여분 몇 개는 화장실 선반에 두고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 옮긴 자리는 안방 베란다 안쪽의 선반이었다. 그쪽은 흔히 문을 중간에 달아서 창고처럼 사용되는 곳으로 우리 집의 경우 철이 지난 구두를 상자에 넣어서 보관하거나, 화분을 올려두곤 한다. 그럼에도 자리가 남아서 여기는 괜찮겠거니 하고 화장지를 봉지째 올려 두었다. 하나는 뜯지도 않은 새것, 또 하나는 쓰던 중으로 10 롤 정도 남아있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흑미가 베란다에서 무엇을 건들었는지 눈치가 빤하다. 나는 설마 하면서 한발 한발 베란다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야말로 하얀 눈밭이 있었다.


 하얀 깃털이 잔뜩 들어있는 베개를 터뜨린 것처럼 빨래들 아래를 가득 채우고 있는 휴지더미를 보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흑미! 어디 있어? 누가 이렇게 해 놓으래!"


하얀 눈 같이 갈기갈기 찢어있는 휴지 더미 속에서 검정 흙덩이 같은 흑미를 한 손으로 꺼냈다. (아직 한 손으로 잡힐 정도로 작아요! 5개월째예요~ )


"이놈의 자식! 왜 이렇게 해놨어?"

"냥냥냥냥!!"


흑미도 뭔가 할 말이 있었나 보다.

흑미가 쳐다보는 곳을 보니, 이 녀석.. 쓰다 만 봉지의 휴지는 약 5 롤 정도는 찢어발겨 놓고, 새로운 휴지 봉지에 손을 댔는데, 그것은 아직 뜯지 않아서 흑미 힘으로 구멍을 내어 안에 있는 휴지를 꺼내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그것이 억울했던 건지 나 한번 보고 휴지 한번 보고... 허허...


그저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 이걸 어떻게 치우지...?


이런 상황을 베란다 입구에서 온이는 그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하하하....


결국 두루마리 휴지 중 살릴 수 없는 것들은 전부 휴지통에 넣고, 나머지는 딸의 방 쪽에 있는 문이 달린 베란다 쪽으로 옮겼다. (그쪽은 고양이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두었다. )


 분명 화가 나는 상황이어야 하는데, 흑미의 덧신 신은 것 같은 손과 긴 양말을 신은 것 같은 뒷발, 그리고 흑미의 보드라운 털을 보니 누그러졌다. 놀고 싶었는데 엄마는 놀아주지 않으니 흑미 나름의 장난감을 발견했을 것이다. 흑미의 몸집에 비해 아직 우리 집은 모험을 할 만한 곳이 많은 걸지도 모른다. 심심해하지 않고 우리 집을 충분히 즐겨주고 있다는 것이 고맙게 느껴졌다.


 흑미와 같은 배에서 나온 다른 고양이들은 적응을 못해 되돌아오거나, 있을 곳을 찾지 못한 아이들도 아직 있다고 들었다. 우리 흑미는 온이와는 다른 매력으로 우리 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때때로 이 아이의 말썽에 귀찮은 일이 벌어지긴 해도, 그런 것들에 비해 이 아이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이 훨씬 크기에, 이 아이에게 받는 것들이 더 가치 있고 행복해지게 하기에 참아낼 수 있다.


 살다 보면 세상에 화가 나는 일들이 많이 있다. 사람 때문에 화가 나기도 하고, 하려는 일이 잘 되지 않아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히 화가 나는 일이지만 세상에는 고양이와 같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분명히 있다.


 새벽녘의 맑은 공기, 아침이면 떠오르는 태양.

맛있는 음식들, 예쁜 꽃..


화가 나면, 이런 것들이 분명히 주변에 있었음에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거기,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잊지 말자. 화가 난다고 해서 계속 화를 내고 있다가는 그 시간에만 볼 수 있는 사랑스러운 것들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온이는 벌써 4살로 온이에게도 5,6개월 때의 귀여운 모습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이 아이는 너무나 귀엽다. 하지만 온이의 5,6개월 때의 초롱초롱한 눈과 몸짓, 냄새는 다시 오지 않는다. 흑미도 그럴 것이다. 흑미와 내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 화를 내지 못한다. 사랑스럽다.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는 지금만이 누릴 수 있는 사랑스러운 것들에 눈을 들어 고정시켜 보자.

세상에 사랑스러운 것은 많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매우 짧아서 화를 내고 있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순간들을 낭비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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