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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 테라피스트 깽이 Oct 10. 2023

가식과 정직사이에서 늘 줄다리기를 한다

삶에서 온 마음을 다해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나를 비추는 창문을 보며 '나는 혹시.. 즐겁지도 않은데 그냥 이들과 맞춰 주고자 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면 참 즐겁고 행복해었던 기억임에도 당시에는 문득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때때로 마음은 너무나 슬프고 아픈데도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지 않은 척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한때는 그런 내가 스스로를 속이는 가식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고 싶지 않고, 그들과 말 하고 싶지 않고, 나를 생각한답시고 조언해 대는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을 때도 많았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정신적으로 많이 불안해 있었고, 자신에 대한 자존감도 땅에 떨어져 있었으며, 주변의 모든것들이 부정적으로만 생각되었던 것 같다. 참 못났던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 속에 두가지 마음이 공존하고 그 두가지 마음이 늘 갈등한다(어쩌면  더 많은 마음이 있을 지도..)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눈을 감고싶은 마음과 빨리 일어나서 아침 일과를 끝내고 싶은 마음,아침 식사를 할까말까, 학교(나 회사)를 갈까말까?


 다양한 할까말까중에 한다고 해서 옳은 것도, 하지 않는다고해서  그른 일을 하는것도 아니다. 따라서 선택을 할 때에는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지금 눈앞에 놓인 상황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옳은 일인지를 생각해보자.


 다소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나를 바라보았을 때 옳은 일을 하고있다고 느끼면 된다. 그 다음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고, 마음이 어째서 따라와 주지않는지 고민해보자. 이때 마음이 따라와 주지않는 이유가 그저 하기 싫어서라면 게으름이나 태만이 근간에 깔려있을 수도 있고, 지금이 아니더라도 가능한 일이라서라면 오만이 깔려있을 수도있음을 인지하자.


 예를들어, 공부를 할까말까에서 한다는것이 옳게 생각이되어 하기로했다고 생각해보자.


 제 3자입장에서 자신이 공부하고있는 그 모습은 매우 옳지만 속마음은 하기 싫고, 온전히 공부를 즐기지 못하는것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공부하고 싶지않는 마음 속에는 지식을 머리속에 넣어 마음에 이르르게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그러한 사이클이 귀찮음, 즉 태만이 깔려있을 수있다. 하지만 그 귀찮음을 뛰어넘어 공부를 하고 지식을 머리와 가슴에 이르르게하는 일을 반복하게되면 공부 시간은 점점 단축되게되고 좀더 전문적인 난이도의 습득도 가능하게된다. 그렇게 되기위해 불편한 마음이 드는  공부의 귀찮음을 참아내는 것이다. 이것을 가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공부 뿐 아니라, 인간관계, 연애등의 삶의 모든 것들도 온전히 즐기지못하고 자신만 부유물이 된것같은 느낌을 갖는 그런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사람이 혼자 사는것이 아니기에 끊임없이 맞춰가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혼자라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한다면 내 자신에게 좋은 습관을 형성 시켜주기 위해서라도 편하고 좋은것만(누워서 뒹굴뒹굴같은?)을 해서는 안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되는 권리가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행복추구권].

헌법 제10조에 해당하는 행복추구권은



고통이 없는 상태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할 수 있는 권리.



우리나라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행복추구권은 근대 입헌민주주의의 핵심인 개인주의·자유주의를 그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 행복추구권에 있어서 행복은 다의적(多義的)인 개념으로, 각자의 생활조건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 있으나, 최소한 인간적인 고통이 없는 상태 내지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행복한 상태를 의미한다.




라고 정의 되어있다.

즉 다양한 의미로 저마다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사람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사회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

누구나 저마다의 위치에서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지닌다는 것인데,


주의해야 할 것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


추구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출처>네이버

 아마도 행복 추구권의 추구는 1번 뜻에 해당될테지만 2번 뜻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입해보면 이렇다.


 행복을 이룰 때까지 뒤좇아 구함.

 행복의 근본이 무엇인지 깊이 캐어 들어가 연구함.


행복을 이룰 때까지 뒤좇아 구하거나 행복의 근본을 찾아 깊이 캐어 연구하는 것에는 지금의 상태 속에는 행복이 희망적이다, 즉 온전히 행복하지 않을 수도있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의 상태는 가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것일까?


나는 가식이 아니라 노력이라 부르고 싶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은 결코 가식이 아니다. 그것을 가식이라 부르며 노력하기를 거부한다면 계속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의 계속 휩싸이게 되면 결국 힘들고 괴로운 것은 자기 자신일 뿐이다.

지금은 다소 가식적이라고 생각이 될지는 모르지만 긍정적으로 생각 하려고 노력한다면,  언젠간 그 도려기 진정한 행복으로 느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 가식이라고 생각하며 하지 않기보다는 가식이라고 생각이 들어도 함께 웃으며 행복해 하는 척이라도 하며 노력해보자. 그리고 조용히 혼자있는 그런 시간에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타인에 대한 열등감이나 시기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자신의 방향이 틀린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바로잡으려고 노력해보자.


 나의 방향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행동들을 보았을 때 비상식적이고
예의가 없고 위아래도 모르고 건전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그리 옳바른 선택들은 아니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마치 사춘기때 무리지어 놀고 있는 이른바 불량 청소년들이 스스로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변의 어른들의 눈으로 볼 때에 좋아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사춘기 시기는 있지만 그 시기를 치기어린 시기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사춘기는 성년도, 아이도 아니기에 불안한 시기이기는 하나, 한 사람의 성인이 되기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있는 과정일 뿐이기에 미성년임을 빌미로 어긋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결론은 현재 자신이 가식적인 행동과 모습을 하고있음에 자괴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에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해 보자.

그것을 향해 가고 있다면 지금 하고 있는 건 가식이 아니라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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