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쯤부터 두 마리의 귀여운 고양이들은 나를 깨우기 시작한다. 물론 간밤에 자신들만의 파티를 즐기다 지쳐 잠들었기에 일어나면 배가 고픈 것이었겠지만 6시를 기상시간으로 정해놓고 있는 나로서는 그들의 어리광이 반갑지만은 않지만, 또 눈을 뜨면 아이들의 귀여운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몸을 일으키고 있다.
정말로 기상시간이 되면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하루를 그려본다. 그리고 옆으로 다가온 둘째 흑미를 만져주고 어느새 내 베개를 차지하고 있는 큰 아이 온이를 한껏 안아주며 새벽녘의 복수?를 시전하고 몸을 일으킨다.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시작한 아침식사 만들기와 점심 도시락 싸기는 이제는 습관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분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이어트식의 아침과 점심은 대부분 야채와 과일 준비, 그릭 요거트 준비, 닭가슴살이나 계란 삶기 등등으로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다. 이런 준비들을 할 때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보는 녀석이 있는데 바로 둘째인 흑미다.
태어나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우리 집에 오게 된 흑미는 첫 만남에서도 바짓가랑이를 기둥 삼아 올라탔지만, 지금도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어리광을 부릴 때가 있다. 밥 줘라, 놀아줘라, 만져줘라 요구도 많이 한다.
아침이 바쁜 이유 중에 하나는 집안일인데, 고양이를 키우는 집이라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고양이 털이 먼지와 함께 뭉쳐져서 이리저리 굴러다니기 때문에 하루에 한 번은 부직포밀대로 밀고, 청소기를 한 번은 돌려줘야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깨끗한 환경에서 돌아다닐 수 있다. 이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묘물이 있으니 바로 둘째인 흑미다!
어려서부터 내가 집안일을 할 때면 늘 쫓아다니던 아이, 요즘에는 빨래를 널 때에도 베란다까지 쫓아와서 빨래에 손을 댄다. 처음에는 아이의 행동이 재미있었지만 방해가 되었다. 이 아이의 방해가 없다면 더 빨리 끝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빨래나 밀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손을 내밀고 있는 흑미의 모습은 방해가 아니라 마치 엄마를 돕고 싶어 하던 아이의 어릴 때 모습과 닮아있었다.
흑미는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돕고 싶은 거구나.
그 후로 흑미가 나를 쫓아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보아줄 때마다 사랑스럽게 느껴졌고 고맙다고 말해 주었다.
"흑미야, 돕고 싶은 마음은 너무 고맙지만, 너는 고양이라 엄마를 도울 수는 없어~ 하지만 이렇게 엄마랑 함께 있어줘서 너무 고마워~ 효자가 따로 없네~"
내가 집안일을 하면 저쪽 한 구석에 앉아 잘하고 있는지 감시? 하는 큰 아이 온이와는 전혀 다른 흑미의 반응은 내가 청소할 때도, 바닥을 닦을 때도, 설거지나 빨래를 할 때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일을 혼자 하고 있으면 왠지 슬퍼질 때가 있다. 내가 바깥일도 하고 집안일도 혼자 해야 하는 걸까... 하고 말이다. 고양이 두 마리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이 너무나 크게 느껴질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내가 먹고 내가 입고 내가 살고 있지만 나 혼자를 위한 것이라면 이렇게 까지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함께 있어주는 두 고양이들이 있어서 내가 건강하게 먹고, 운동도 하고 청소도 하며 삶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해 준다. 내가 건강하고 열심히 일해야 이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도 사주고 이 아이들과 놀아주고 할 수 있는 거겠지.
자녀가 어릴 때 집안일을 시키도록 조언받는다. 그것은 아마도 자녀가 어릴 적부터 집안일을 하지 않고 집안일을 하는 엄마의 뒷모습만을 보았다면 집이 자신의 집이 아니라, 엄마의 집이라는 인상이 강해져서 집안의 어려운 일이나 행복한 일을 남의 일처럼 여기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행복하게 하는 단어이지만, 모두가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행복과는 거리가 먼 단어가 되고 만다.
흑미가 집안일을 돕고, 흑미의 모습에 웃음을 지으며 집안일도 기쁘게 하고, 또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온이가 있어 지금의 환경에 행복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