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필사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거슬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옆으로 눈을 돌려 보니 책장에서 책을 한 권씩 떨어뜨리는 흑미가 눈에 띄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의 끝부분을 손톱으로 살짝 꺼내서 바닥으로 내동댕이 치고는 내 눈치를 본다. 일부러 책을 쉽게 꺼내지 않게 하기 위해 책장 속에 상자로 만든(만들었다기 보다는 그냥 넣어둔) 간이책꽂이와 앞에 끼워둔 북엔드를 옆으로 치워가면서 까지 책을 꺼내서 떨어뜨리는 녀석... 엄청 똑똑하다.
흑미는 온이에 비해 체력이 좋은 것인지, 그냥 성격이 그런 것인지 에너지가 넘쳐난다. 아침이면 온이와 함께 거실과 방을 뛰어다니며 우당탕탕~ 숨바꼭질을 하고, 내가 퇴근해 와서 밥을 먹으려 앉아있으면 자기와 놀아달라고 이렇게 시위 아닌 시위를 하는 것이다. 이 아이는 내가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눈길을 주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새벽 5시가 넘으면 내 기상시간인지 어떻게 알고 방에 들어와 방의 책꽂이의 책을 한 권 두권 떨어뜨린다.
오후에는 거실 쪽 내가 앉아있는 곳의 책꽂이의 책을 떨어뜨린다.
"흑미야! 엄마가 너 보고 있으니까 그만둬줄래??"
아무리 달래도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정말 중요한 할 일이 있을 때는 방에 넣어두고 문을 닫는다. 그러면 또 몇 분 있다가 세상 불쌍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끼이이이잉"
"이제 안 그럴 거지?? 알았어 풀어줄게! "
그러고 나오면
"냥냥냥!!!!"
("엄마가 나를 가뒀어? 너무해!!" 라는 듯...)
에그.. 잔소리꾼...
흑미가 쏘는 레이저는 치명적이다. 귀여운 장난꾸러기.
이 아이가 부리는 말썽은 사랑스럽다. 하지만 그런 흑미랑 오래도록 놀아줄 수 없고, 해야 할 일이 있다 보니 이 아이를 충분히 만족시켜 줄 수 없어서 미안하게 생각이 될 때도 있다. 늘 집에 돌아가 현관문을 열면 "보고싶었다냥!"이라고 하듯 현관까지 마중을 나와 레이저를 쏘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이라도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내야겠다 싶어 한동안 쓰다듬어 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만족스럽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고양이는 너무나 귀여운 생물체이다.
키우다 보니 고양이들의 털뿐 아니라 이 아이들이 밥을 자주 먹고 잘게 부숴서 먹다 보니 자투리가 여기저기 널려있다. 또 벤토나이트와 카사바 모래? 이런 걸 사용하다 보니 화장실 주변은 늘 모래가... 그래서 매일 청소기를 돌려야 하고, 걸레질도 충분히 해야 한다. 청소기도 매일 청소해 줘야 한다. 털이 여기저기 낀다. (바쁜 하루를 살다 보면 매일 청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말 고양이가 귀엽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해야 할 모든 일을 할 수 없다.
매일 청소를 해야 하지만, 전체를 청소하지는 않는다.
매일 책을 읽고 싶지만, 매일 읽지 못한다.
매일 영어공부를 하고 싶지만, 매일 하지 못한다.
매일 요리를 해 먹고 싶지만, 매일 요리를 하지는 못한다.
못하는 것들에 집중을 하다 보면 슬퍼지기도 하고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래서,
보이는 부분을 청소했으니, 흑미랑 10분 놀아줄 수 있다.
10분 흑미랑 놀아줬으니, 온이를 10분 만져 줄 수 있다. (온이는 놀아주는 것보다 마사지해 주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다)
요리는 못했지만, 그 시간 책을 읽을 수 있다.
매일 하면 좋은 일들도 있지만,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하는 일, 그리고 줄일 수 있는 일을 구분해 놓으면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 같다.
완벽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깨끗한 집, 늘 예쁘게 앉아있는 고양이, 매일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 따위는 드라마에서나 있는 것일 뿐 실제로 그렇게 하려면 내 몸은 정말 여러 개여야만 가능하다.
어느 정도 한계점을 스스로 정해 두고 그 정도까지 했으면 "오늘은 괜찮았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며 저녁을 맞이하자. 그렇게 오늘을 잘 보낸 나에게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