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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 테라피스트 깽이 Dec 30. 2022

나는 40살이지만 아직 어린애인가 봅니다.

아직은 누군가의 손주이기에 마지막 어리광을 부려보았습니다.

2022년 12월 마지막주..

나는 손주로서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게 되었다.

나이를 먹고 40이 넘어서 이제 나도 어른이구나 하고 자만했었는데 아직도 나는 할머니의 "우리 강아지"였던 것이었다.


 나에게 남은 마지막 할머니와 헤어진 이번 일요일은 그리 슬프지 않았다.

나를 조금이라도 키워줬던 외할머니와의 사별에서는 꽤나 마음이 힘들고 괴로웠고, 나를 많이 예뻐해 주시던 친할아버지와의 마지막은 한국에 있지 않아서 함께 할 수 없었지만 아쉬웠다. 아빠보다 더 날 예뻐해 주셨던 할아버지였기에 꽤 든든하게 생각되었던 것 같다.

이 전의 사별들에 비해 비교적 담담했던 친할머니의 장례식... 할머니가 몸이 안 좋아진 후의 기간이 다소 길었기에 슬픔이나 괴로움은 그다지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어른으로 행세해 왔던 내가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엄마 아빠와 고모들, 작은 아빠와 고모부 사이에 끼니 나는 아직 어린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대를 거쳐있기 때문에 한발 뒤에서 좀 더 객관적인 상태로 우리 친척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를 비롯하여 10명의 손주들이 있고, 그중 9명이 참석했다. 그들은 나이가 벌써 막내가 20 중반이 되어있었고, 내가 가장 나이가 많은 손주에 증손주인 우리 딸이 있다. 남자아이가 3명 나머지가 다 여자 아이들이기에 나와 내 동생을 필두로 장례식 손님맞이는 잘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여느 장례식에서 볼 수 있었던 곡소리나, 눈물은 볼 수 없었던 이상한 장례식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할머니를 엄마로 둔 고모들이나 아빠들은 짧은 눈물이 나 묵념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할머니의 장례식을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생각이 되었다. 이것은 아마 경험이 없다는 증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가 일을 하는 곳과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 곳이나 친구들에게는 내가 갑자기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했으니 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이유로서 장례식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도 한 몫하는 것 같다. 할머니의 자식 형제들만 해도 4명에(온 사람만) 사위 며느리까지 세명, 즉 어른이 7명이나 되니 그들의 지인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장례식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의 슬픔보다 경제적인 쪼들림의 슬픔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장례식이 슬펐던 이유는 그래도 그렇게 들어온 부의금이 장례식 비용보다 조금 더 컸기에 남은 금액을 어떻게 하느냐에 목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돈이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좀 잘 살았다고는 하지만 정말이지 단칸방에서 우리 네 가족이 살았고, 일정하지 않는 수익을 가져오는 우리 아빠는 그 수익마저도 술과 담배로 엄마를 직장으로 내몰았다.


 가난이 싫었지만 하고 싶은 것은 많았고,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돈이 없어서 그 한계까지만 했다. 더 하려고 하지 않았고, 돈이 생기면 하고 싶은 것을 해 왔다. 그러다 보니 내가 정말 잘하는 것,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는 생각해 보지 않은 채 돈 버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분리하지 않으며 그 시간시간을 때우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바보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일까.. 나는 쪼잔해 보이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남들 앞에서 "나 돈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돈이 없을 때는 친한 친구가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고 해도 일을 핑계로 나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돈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고 생각하며 있을 때 좀 더 베풀고, 없을 때는 얻어먹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더 많은 것을 베풀려고 하지, 남겨 먹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장사는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러한 경향은 허풍쟁이 아빠와 사람 노릇을 강조하는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것일 것이다.


  이번 장례식에서는 손주들의 나이도 조금 높았기에 손주들의 이름으로 들어오는 부의금도 꽤나 많았다. 공통으로 사용하는 계좌가 있음에도  뭔가를 아는 것인지 개인 계좌를 달라고 하는 분들도 있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으로 무엇인가를 깨달은 엄마가 나서서 손주들의 이름으로 들어오는 부의금은 손주들에게 돌려주자고 주장했다. 이유인즉슨, 그들의 이름으로 들어오는 돈은 손주들이 지인들의 특별한 날에 나간 돈이었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공동계좌로 들어오는 돈들은 장례식 비용으로 사용하고 남은 것은 부의금이 많이 들어온 가족들로 비례해서 나누기로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생기게 된 불란은

1. 개인통장으로 들어온 부의금이 투명하지 않았다.

2. 서로 아는 손님의 부의금의 주인이 누구냐로 인한 다툼


정말... 큰돈이 남은 것도 아니고 정말 더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할머니가 사용하시던 전자레인지 등의 가전기기는 물론 안마기까지 탐내는 사람들이 있었고, 본인 계좌로 들어온 돈을 왜 오픈하냐며 서로 투닥거리는 가족도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런 상황들이 너무나 싫었다.

장례식의 본질마저 잃게 된 이 장례식이 왜 필요한 것인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내가 생각한 장례식은 무엇이었나..

사실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계시면서 꽤 오래 사시기도 하셨고 건강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 기간마저도 나는 외국에 있었기에 자주 찾아뵙지 못했고, 한국에 와서도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해야 한다고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부터 1년에 한두 번씩은 꼭 만났었고, 그동안 좋았던 기억, 그렇지 않았던 기억들 속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그렇게 기억을 함께 공유하던 분들이 이제는 없어진 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살아계셨을 때 손이라도 한번 더 잡아드리고 안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 자신에의 자책들 그리고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더 잘해 줘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 장례식이 아니었던가..


할머니가 혼자 계시면서 신세를 졌던 분들이 손님으로 왔다.

젊은 남자분으로 아내와 함께 2주에 한 번씩 방문하여 할머니의 말을 들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분은 할머니가 몸도 성치 않은데도 자신들을 반겨 주셔서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고 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할머니의 일면을 본 것 같았다. 우리 할머니를 이렇게 자주 찾아주신 분이 계셨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그분이 들려주는 말을 들으며 나는 왜 손주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후회도 되었다.


 하물며 장례식을 끝내고 장지에 다녀와 집에 있는데 장례식장을 지키며 열심히 서빙을 해준 중3짜리 우리 딸도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나는 왜 할머니께 낯가림을 했을까.. 살아계셨을 때 좀 더 찾아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

고맙게도 우리 딸이 장례식에서 제일 많이 울어줬다.

그 누구도 눈시울조차 붉히지 않은 장례식이었다. 혼자가 되면 엄마의, 시어머니의 빈자리에 눈물을 흘리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장례식장에서의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엄마는 며느리면서도 한 달에 꼭 2~3번은 할머니 좋아하는 피자를 몇 판이고 싸들고 요양원을 방문했다. 계절마다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요양원으로 날랐다.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을 때에는 직접 병원으로 모셨고, 퇴원도 엄마가 시켰다. 그 외 친척들은 큰며느리라며 모든 것을 엄마에게 맡겼다. 막내고모만이 엄마를 위로하며 도왔다.

 

 할머니의 아들, 딸들은 내가 보기에도 많은 것을 하지 않았고, 방치했다. 물론 그들의 삶도 매우 바쁘고 힘들었을 것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식들이 많으니 매일이 힘들고 고되겠지. 그런 데다가 다들 하나같이 돈이 없다고들 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장례식을 치르고 남은 돈에 모든 관심이 쏠렸다. 장례식이 채 끝나지 않은 첫째 날부터 그랬다. 다른 가족들도 그런 걸까..


 그냥 내 생각으로는 이제 집안의 어른들도 없으니, 그다음 어른인 우리 아빠가 1년에 한두 번이라도 모임을 주선하여 식사라도 하게 될 때 사용하면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이 안 맞고 서로 싸우는 관계라면 욕심내는 사람에게 돈이고 뭐고 다 주고 헤어지는 게 나을 듯해 보였다. 장례물품과 식사남은 것 마저 눈이 번세번세 하게 찾아다니며 싹 가져갔으니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딸에게 나는 말했다.

"엄마는 장례식 하고 싶지 않아.. 혹시 내가 죽거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주렴..."


누군가 나 때문에 슬퍼하는 것도 싫고, 나의 장례식에 부의금을 주는 것도 싫고, 또 그것 때문에 싸우는 것도 싫다. 무엇보다 이번에 만난 친척들은 절대로 안 왔으면 좋겠다. 그냥..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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