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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 테라피스트 깽이 Jan 13. 2023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그 사람에게..

소문도 없어 더 그리운 존재에게... 

내가 어렸을 적... 

내 기억이 닿았던 그 시절에 나에게는 딱 두 살이 많은 개구쟁이 사촌 오빠가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 집안의 장남의 큰 딸로 할아버지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오빠는 큰 고모의 큰 아들로 우리 집안에서는 처음 태어난 아이 었고, 아들이었기에 우리 집안 실세인 할아버지에게 큰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여느 가족과 비슷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힘이 세고, 고집도 세고, 강하고 국회의원을 꿈꿀 정도로 야망도 있었다. 뭐 지금 부모님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것들은 허세라고 하지만 그 당시의 내 눈에는 그야말로 실세라면 실세로, 할아버지의 힘을 등에 업은 나로서는 아빠 밑으로 넷이나 딸려있는 삼촌, 고모들과 나보다 나이 어린 그들의 자녀들이 한없이 어려 보였고, 나의 관심 밖이었다. 


오빠와 나는 두 살 차이, 내 아래로 동생은 네 살 차이, 그리고 그 아래는 또 두 살 차이... 그러니까 꽤 터울이 많았기 때문일까 오빠와 나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빠는 나를 귀여워했고, 많이 좋아해 줬던 것 같다. 뽀뽀하는 사진까지 남아있었던 걸 보면 정말 많이 좋아해 줬다. 비록 나는 귀찮아했지만... 


점점 자라면서 어른들의 사정으로 소원해지고.. 거기에 더해 나는 6년이라는 세월을 한국에 있지 않았기에 더 멀어졌다.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는데, 가장 큰 일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것이다. 가세가 기울고, 다들 자기 일에서 한창 바빴어도 그래도 어릴 적에는 매 명절마다 함께 모였었는데, 어느새 부터인가 아이라는 딱지를 떼고, 성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자신부터 돌보아야 했기 때문인지 더 이상 명절이라도 모이는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우리 아빠 쪽의 우애는 거짓된 우애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만나면 싸우고 스트레스받는 것이 다반사이니 할아버지가 안계시게 되니 만날 이유마저 사라진 것이다. 


 물론 할머니도 계셨지만, 그저 조용히 자리만 지키던 할머니 셨기에 그들을 모으는 힘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아빠 쪽 가족들의 만남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야무야 성사되지 않았기에 그저 다들 사느라 바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는 사이 손주 딱지를 떼는 날이 왔다. 바로 22년 12월 막주에 있었던 '할머니의 장례식'


이제는 동생들도 아저씨 아줌마가 되었다. 장례식에서 일을 하는 어른들이 우리가 된 것이다. 

관을 드는 것도 이제 우리 어른이 해야 하는 일... 하지만 그 사이에 우리 오빠는 보이지 않았다. 


나를 좋아했던 그 오빠... 어느 고등학교, 어느 대학교, 어느 회사.. 내가 나 사느라 바빴던 그 시기에 그 오빠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들었다고 해도 내 귀에 담아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기에 막연히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오빠도 가끔 한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던 우리들과의 시간들을 되돌아볼까. 


 오빠네 엄마인 고모는 다소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몇 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2년 정도 된 거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이었는데 순수하고 또 순수했던 고모의 장례식에서도 그 오빠는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 입장에서 큰고모는 불효녀였고, 큰고모 입장에서는 오빠가 불효자겠지.


 삶의 퍽퍽함이 감옥이 되어 오빠를 나오지 못하게 한 걸까. 오빠에 대한 마지막 소문은 어릴 적 오빠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매우 그립다. 

지금 내 옆에 있어서 1년에 한두 번이라도 만날 수 있었다면...

그래서 오빠의 엄마나 할머니의 빈자리를 함께 슬퍼하고 애도할 수 있었다면... 

생각보다 가장 큰 손주라는 이름이 무거웠나 보다. 


그 자리의 무게가 그들의 빈자리를 더 크게 만들었나 보다. 

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친척들 사이에서 결국 남은 결심은 '다시는 너희들을 보지 않을 것이다' 였으니 힘들 수밖에... 


오빠. 

나는 어른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오빠가 매우 그리워. 

나를 보며 웃어주던 그 장난기 어린 눈이 그립고, 

조목조목 따져대는 나를 그저 바라봐 주던 

오빠가 너무 그리워. 


같은 하늘아래 살고 있을 테니 

어디서든 열심히 살길 바라. 

어디서든 오빠의 엄마가 그랬듯,

긍정적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으면 좋겠어. 


그러다가 주변을 둘러볼 잠깐의 여유가 있다면

오빠의 가족이었던 우리들을 

기억해 주길 바라. 


오빠의 존재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음을...

돌아온다면 기쁨의 눈물을 흘려줄 사람들이 있음을 

꼭 기억해 주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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