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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짧은두루미 Feb 13. 2023

자꾸 찾아오는 무기력을 이기는 방법

무기력, 근데 이제 치질을 곁들인...

번역 아카데미 개강 이후로 활기찬 나날들을 보냈다. 잘하고 싶었고, 열심히 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몰입했다. 임신과 출산 이후로 처음으로 '활력'을 느꼈다. 난 유전으로 물려받은 우울을 늘 기본으로 깔고 산다. 그 우울보다 커다란 활력소가 있어야만 비로소 조금 즐겁고, 그렇지 않을 때의 디폴트값은 주로 조금 우울하다. 번역 공부를 시작하며 이젠 임신과 출산에서 시작된 긴 우울의 터널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다. 말 못 할 비밀... 바로 치질이었다.


정확히는 치핵, 4.16kg의 아기를 품고, 자연분만한 내게 남겨진 임신과 출산의 흔적이었다. 큰 일을 보고 나면 쏘옥 머리를 내밀지만, 이내 들어가니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내왔는데, 지난 2년간 잘 따라온 암묵적 규칙을 어기고 이 놈이 들어갈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었다. 엉덩이를 까고 똥꾸멍을 찌름 당하는(?)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진료를 보는 것이 너무너무 싫었지만, 직감적으로 병원에 가야 함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수술을 선고받았다. 당장 당일 오후에 수술을 하자는 의사에 말에 바빠서 안 된다며 도망치듯 나와 이틀 후로 수술 일정을 잡았다. 그때부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방구석에 누워 남들의 수술 후기를 읽으며 두려움에 떠는 것뿐이었다. '똥꼬로 면도칼을 낳는다', '고슴도치를 낳는 것 같다'는 후기들은 콧구멍으로 수박을 낳는 것에 종종 비유되는 출산의 후기를 떠올리게 했고, 출산 후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하루 종일 조리원이 떠나가도록 엉엉 울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아픔과 서러움이 버무려져 쓰나미처럼 터져버린 눈물샘을 제어할 수 없었던 날. 그것이 지나간 나의 과거가 아니라 다시 펼쳐질 나의 미래라니... 그 과정이 아직도 생생해서 둘째도 포기했는데... 아기가 어린이집에 가고 텅 빈 거실 바닥에 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울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치질 걸렸다고 우는 34살이라니... 심지어 지금 당장 아픈 것도 아닌데...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병에 걸렸으면 치료받고 나아지면 되는 것인데, 왜 이렇게까지 슬플 일인지 머리론 이해할 수 없었다. 


큰 병원을 가보라는 주변인들의 권유에 일단 예약했던 수술을 미뤘다. 엉덩이에 빼꼼 머리를 내민 치핵을 달고는 있었지만, 일상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그런데 그 작은 덩어리가 가져온 무기력은 일상을 완전히 망쳤다. 


누구든지 힘든 상황에서 단골로 찾아오는 반응들이 있다. 어떤 사람에겐 힘든 상황이 분노나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자책을 하기도 할 것이며, 누군가는 슬퍼하기도 한다. 나의 단골 반응은 무기력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저 누워만 있는다. 명상인의 마인드로(?) 그런 나를 알아차려도 이미 무기력한 나에겐 달리 이길 수 있는 방도가 없다.


이런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은 루틴이란 것을 안다. 회사를 다닐 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어나서 주어진 일을 했는데 지금은 나를 일으켜 줄 루틴이 없다. 무기력이 찾아오면 마냥 누워만 있으니 이런 내가 싫어지고, 또 더 깊은 무기력에 빠지는 굴레, 그 굴레를 벗어나야만 한다. 


그나마 주어진 아카데미의 과제 덕분에 엉덩이에 찾아온 불청객은 잠시 잊고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얼른 데뷔해서 나의 일을 갖고 싶다. 책임감 하나는 강한 나에겐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 언제나 최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회사 다닐 때만큼은 아닐지라도, 어떤 것이든 '내 일'이 있는 것은 정말 중요한 듯싶다.


아직 데뷔는 먼 훗날 일이지만 일단 이 웃픈 치질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일단락됐다. 큰 병원에 진료를 보러 가니 수술할 단계가 아니라면서 아주 간단한 처치로 치료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전 병원의 과잉진료가 낳은 어이없는 해프닝, 치료 이후 잃었던 입맛도 되찾고, 다시 활력을 찾았다. 언제 다시 무기력이 찾아올지 모르니, 일상의 루틴을 잘 구축해 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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