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들을 위한 동화
#2 붉은 대야:
어머니들을 위한 동화
언니들이 입던 옷은 싫다는 것이다. 보라색 점퍼, 밤색 코트, 빨간 스웨터, 셋째는 겨울옷이란 옷은 죄다 꺼내 방바닥에 부려 놓았다.
“이것도, 이것도, 또 이것도 다 언니들이 입었던 거잖아! 엄마는 동생만 새 옷 사주고, 나는 왜 다 헌 옷이야? 나도 새 옷 갖고 싶어. 물려받는 거 싫단 말이야!”
악을 쓰며 눈물 바람이다. 나라고 헌 옷 입히고 싶겠냐만, 철모르는 아이를 붙잡고 차마 형편 타령을 할 수가 없다.
10살 아이 옷은 어른 옷에 비하면 천도 반절은 덜 들 텐데, 가격은 절대 반절이 아니다. 두꺼운 겨울옷이라면 특히 더 값이 나간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들에게 매번 옷을 사주기가 부담스러워 셋째 딸은 첫째, 둘째 딸의 옷을 물려 입히는 일이 많았다. 특히 이번 겨울은 셋째에게 옷을 한 벌도 사주지 못했다. 거기서 사달이 난 것이다.
스물세 살에 만난 남편은 여섯 형제 중 막내, 다섯 형들에게 치이느라 못 먹고 못 입고 손에 쥔 것 없이 거칠게 자란 사람이었다. 작달막해도 눈빛과 손이 다부졌다. 어려서부터 겪은 풍파가 그를 단단하게 만든 것 같았다. 빈 손으로 서울에 올라왔지만 나를 책임질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 쳤다.
신혼살림은 넷째 아주버님 소유의 집 지하실에 간신히 차렸다. 그 마저도 눈칫밥 깨나 먹어야 했다. 남편은 아들만 득실한 집에서 자라서인지, 아들 욕심이 컸다. 셋째까지도 내리 딸, 네 번째가 되어서야 겨우 귀한 아들을 얻었다. 남의 집에 얹혀 사는 없는 살림이건만 딸린 입은 이제 여섯이나 되었다.
남편에게는 밤낮도 주말도 없었다. 자식들 굶기지 않으려고, 설움 겪게 하지 않으려고 닥치는 대로 몸 사리지 않고 일했다. 덕분에 나도 몸 사릴 여유가 없었다. 기댈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두 살 터울 나란한 사 남매를 혼자 키워야 했으니 말이다.
“엄마 '쇠빠지게'가 뭐야? 엄마는 왜 맨날 쇠가 빠진대?”
훈계를 듣던 셋째가 아직도 눈물 자국 선연한 얼굴로 돌연 묻는다. 혼나는 와중에도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딸아이의 천진함에 설핏 웃음이 난다. 아이가 내팽개쳤던 옷을 하나씩 그러모으며 말한다.
“너희들이 엄마 말 잘 들으면 엄마 쇠 안 빠져. 그러니까 고집 피우지 말고 엄마 말 좀 잘 들어.”
쇠빠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구나. 내가 많이 힘들구나. 웃던 것도 잠시,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라 눈앞이 흐려진다. 이내 고개를 흔들고 맘을 다잡는다. 네 아이 키우는 엄마는 울 시간도 없다고. 더 강해져야한다고.
다짐하기 무섭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나 싶더니 옆집에 놀러갔던 아들이 들이닥쳤다.
“엄마, 나 눈썰매장 가고 싶어! 눈썰매장 데려가줘!”
등장부터 조르는 재주가 남다른 막내답다.
“갑자기 웬 눈썰매장 타령이야. 얼른 신발부터 벗고 들어와.”
“옆집 보성이는 어제 용인에 눈썰매장 갔다 왔대. 루돌프도 보고 햄버거도 먹었대. 나도 눈썰매장 데려가 달란 말이야.”
눈썰매장이면 입장료는 얼마 하려나. 그걸 또 네 명 다 보내려면 얼마가 들까. 벌써부터 엄두가 안 나 까마득해지려는 찰나, 선 채로 떼를 쓰는 막내에게 큰 딸이 달려가 알밤을 먹였다.
“지난번엔 로봇 사달라고 그렇게 조르더니 이번엔 눈썰매장이야? 엄마 좀 그만 졸라라.”
이번엔 막내가 울 차례로구나. 큰 누나의 꾸중과 매운 손맛에 아들의 울음보가 시원하게 터졌다. 정말 한 시도 조용할 새가 없다.
“어휴, 시끄러워서 그림에 집중할 수가 없네!”
스케치북을 펼쳐 놓고 그림 그리기에 심취해있던 둘째도 한마디 보탠다. 우는 소리, 혼내는 소리, 불평하는 소리… 작은 방이 다섯 가지 다른 주파수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이럴 때면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으로 혼자 훌쩍 떠나버리고 싶다. 엄마고 뭐고 다 내려놓고 하루만 휴식을 좀 달라고 나도 아이처럼 한번 떼써보고 싶다.
옷 정리도 아직 다 못 했고, 부엌엔 아직 설거지 거리가 그대로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나도 파업하련다. 집안일도 싫고 아이들도 버겁다. 멍하니 한동안 앉아있었다.
창밖에는 싸락눈이 오고 있었다. 포슬포슬 내려 차곡차곡 눈이 쌓인다. 바라보고 있자니 번쩍하고 드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광으로 들어가 커다란 붉은 대야를 집어 들었다.
“옷 단단히 껴입고 다들 따라와. 장갑도 끼고.”
“엄마 어디 가려고?”
“잔소리 말고 일단 엄마 시키는 대로 해.”
동생들의 질문은 큰 딸이 알아서 교통정리를 한다. 둘째는 자신부터 먼저 채비하고는 셋째에게도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있다. 줄줄이 기차처럼 아이들을 뒤에 매달고 붉은 대야를 든 나는 개선장군처럼 앞장을 섰다.
“엄마 너무 힘들어. 어디까지 가는 거야?”
골목 골목을 지나 눈 내린 동네 뒷산을 오르는데 참다못한 첫째가 가쁜 숨을 내쉬며 물었다. 나는 일부러 알려주지 않고 계속 산을 올랐다. 어른에겐 그깟 동네 뒷산인데,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는 제법 힘이 드나보다.
이윽고, 산마루에 도달했다. 평평하게 펼쳐진 그 곳에 발자국 하나 남겨져있지 않은 새하얀 눈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솜털처럼 폭신해 보이는 눈이 소복이 쌓여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의 입이 함박 벌어졌다.
“엄마, 눈! 눈!”
막내둥이가 제일 신났다.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밭과 섞여 뒹굴며 하얗게 온 몸을 칠했다. 곧 고사리 같은 손으로 눈을 뭉쳐 눈싸움을 시작한다. 그러고 있을 사이 나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있구나, 있어! 누군가 버리고 간 비료포대가 몇 장 나뒹굴고 있었다.
포대와 대야를 줄로 단단히 묶어 적당한 비탈길 위에 내려놓았다.
“엄마, 뭐해?”
어느새 눈싸움을 멈춘 아이들이 다가와 있다. 말똥말똥한 눈동자 여덟 개가 대야를 바라본다. 오늘 눈물 좀 뺐던 셋째와 막내부터 태웠다. 맨 뒤는 내 자리다. 두 아이를 끌어안고 큰 애와 둘째에게 말했다.
“이거 썰매야. 힘껏 밀어!”
대야가 신나게 눈비탈길을 미끄러진다.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붉은 대야는 순식간에 미끄러져 푹, 눈 쌓인 구석에 처박힌다.
“엄마, 또, 또!”
아픈 줄도 모르는지 아이들은 그저 까르르 웃었다. 몇 번을 오르고 미끄러졌는지 모른다. 마무리는 항상 푹, 하고 처박혀야 한다. 그래도 아이들은 지치지 않고 ‘한번 더’를 외친다. 그 웃음소리에, 밝은 목소리에 나도 덩달아 힘이 난다. 이렇게 소리 내어 웃어보기도 참 오랜만이었다.
어려운 형편 속에 아이 넷을 키운다는 게 얼마나 힘든가. 포기하고 싶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삶은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인지 때로는 억울하기도 했다. 이렇게 연어처럼 살다 죽는 것인가. 알을 낳기 위해 힘겹게 강물을 거슬러 올라와, 산란 후에는 죽은 몸으로 새끼를 먹여 살린다는 연어 말이다.
아직 답은 모르겠다. 하지만 엉덩이가 얼얼하도록 신나게 대야 썰매를 탄 오늘, 이것만은 확실히 깨닫는다. 내가 태어난 게 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나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게 바로 이 아이들의 웃음이라는 것. 힘든 것도 너희들 탓이지만, 힘나는 것도 너희들 덕분이라는 것 말이다.
아직 아이들은 어리고, 나는 엄마다. 지금은 포기할 때가 아니야. 힘내자.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보며 기운을 충전하기로 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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