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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Feb 14. 2022

블레이드 러너 2049

카프카에 대한 어느 위대한 소설가의 분석을 읽다가, 갑자기 카프카의 소설에 등장하는 K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쓴 부분에서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주인공 K가 떠올랐습니다. 이 이상한 연상으로 월요일을 앞둔 주말의 마지막 순간에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한 편을 다시 들춰 보게 되었는데,  오늘은 그렇게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다시 보며 떠오른 단상들을 공유해 볼까 합니다.




제일 첫 장면을 화면 가득히 눈동자로 채우며 영화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같은 해에 개봉된 영화 <에어리언 : 커버넌트>의 첫 장면 역시



눈을 보여주며 시작하는데, <에어리언:커버넌트>를 연출한 리들리 스콧 감독은 오리지널 <블레이드 러너>를 연출한 감독이자 이번 속편의 제작을 맡은 사람이기도 하죠.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첫 장면에 보이는 눈의 모습을 보며 대부분의 관객들은 주인공 K를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이라고 생각할 텐데, 약간은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의 얼굴이 담긴 여러 사진을 통해서 우리는 라이언 고슬링의 눈동자도 에어리언의 데이비드를 연기한 마이클 파스밴더처럼 푸른색에 가깝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죠. 눈썹 역시 영화에서 처럼 완전한 금발은 아닌 것 같고요, 그렇다면 이 눈동자는 첫 편에 등장하는 로이 베티에 대한 오마주인 것일까요?




또 왜 두 편의 SF영화에서(그것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두 감독이 거의 동시에 연출한 것으로 믿어지는 영화들이), 안드로이드(인조인간)의 눈을 보여주며 영화를 시작하는 것일까요?


리들리 스콧에 대한 드니 뵐뇌브의 오마주 또는 존경이었을까요? 아니면 인간과 사이보그를 나누는 경계가 눈이라는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즉 우리의 영혼을 보여주는 투명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시적이며 서정적인 시각을 두 감독이 단순하게(서로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공유하게 된 것일까요? 


전편의 마지막 장면 (그 유명한 tears in rain scene이 가지고 있는 시적 감수성)에서 새로운 시작을 끌어내어 두 편이 감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완전한 한 편의 시리즈물이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확인시켜 주고 싶었을까요?




로이는 마지막 대사를 통해 우주의 경이, 생명의 신비를 경험한 순간들에 대한 감성을 드러내는데


 



시퀄인 이번 영화에서도 감정적으로 전편과 완전히 공명하고 있음을 유사한 느낌의 엔딩을 통해서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빗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던 로이 베티처럼 스스로를 K가 아닌 조로 소개하는 K(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조라고 불러야 하는지 관객의 관점에서 애매해지는)는 마지막 장면에서 쏟아지는 함박눈 아래로 전편의 로이 베티처럼 존재가 마감되는 순간에 완전한 자유(자신을 가둔 굴레에서 탈출하는)를 느끼는 아주 낭만적인 ( 흔히 이야기되는 사랑스러운 감정으로서 낭만이 아닌, 19세기를 관통하던 질풍노도와 같은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을 일으키는 감정으로서 - 그렇기에 실제로는 한없이 안타깝고 쓸쓸하게 보이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영화는 여러 장면에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순간들을 키취적으로 들춰내며 지적인 유흥을 도발하고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K가 여인의 몸을 통해 태어난 안드로이드의 비밀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려는 장면입니다. 가상현실로만 존재하던 (안드로이드는 그래도 물리적인 육체를 갖고 있지만 오로지 3차원 영상에서만 존재하는) 조이가 자신도 따라가겠노라며 하지만 자신의 코드를 통해 시스템이 그들을 추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을 메인 프레임에서 삭제하고 휴대용 기기에만 담아서 가져가라는 말을 하는 순간, K는 그럴 수는 없다고, 만약 잘못되면 영영 사라지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실존(존재라는 의미)은 그 존재성이 사라질(소멸될) 가능성을 갖게 되면서부터 현존하게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관념 속에서 소프트웨어를 통한 3차원 영상으로만 표시되던 비존재가 죽음이라는 생각을 스스로 함유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 비존재는 외형이 갖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념 속에 갑자기 실재적인 존재로 표상되기 시작하는 것이죠.




또 다른 장면은 K와 경찰청 상관인 조시 사이의 대화입니다.


죽은 안드로이드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를 찾아내 제거하라는 자신의 명령에 K가 머뭇거리는 것(동요하는 것)을 본 조시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K는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와 달리 태어난 아이는 영혼이 있을 것 아니냐며 제거 명령에 부정적으로 대응합니다. 조시는 너 에겐 그 영혼이 없으니 편하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을 던지는데, "넌 영혼이 없어도 잘해 왔잖아. 영혼이 무엇이길래? "


 여기서 우리는 영혼이라는 단어가 우리 머릿속의 철학적인 사고의 틈을 잠시 비집고 들어오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영혼이 뭐길래 같은 안드로이드 사이에서는 누군가는 소유하고 누군가에게는 없는 것일까요?




영화가 결론으로 넘어가는 장면에서 다 죽어가던 K는 다른 안드로이드로부터 구조가 됩니다. 그들은 K가 잡혀간 데커드를 쫓아가서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하죠. 그래야만 태어난 안드로이드의 비밀이 숨겨질 것이고 바로 그 태어난 (만들어지지 않은) 안드로이드에 달려 있는 그들의 미래 (인간의 속박에서 탈출해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 멋진 신세계)를 열어 줄 것이라고 말이죠.


어딘가에서 많이 들어봄직한 

"뭔가 신적인 계시가 있어, 우리는(우리만) 구원을 받게 될 것이야"라는 개념은 항상 우리를 또 다른 고민에 휩싸이게 하는데, 사실 하나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또 다른 속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찾는 방법일까요? 물론 그렇다고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이 올바른 생각이란 이야기는 당연히 아닙니다. 그저 역사가 보여주는 아이러니를 생각해 보면, 인생이란 것이 항상 돌고 돌며 고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떠오른다는 것이죠.


이 부분의 아이디어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의 황당함도 떠오르게 합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그분의 후계들, 하지만 그 황당한 소설의 스토리 속에서도 그 후계자는 단지 괴상한 추종자들의 이상향일 뿐 현실적인 의미는 전혀 보여주지 못했는데, 수 십 년이 흐른 뒤 잘 만들어진 SF소설에 삽입된 이 기호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외에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작가 프루스트가 창조한 감정에 의해 형성된 진정한 기억에 대한 묘사 등 영화는 요즘 할리우드식 잘난 영화가 보유한 지적인 냄새를 살짝 풍기며 잘난 체 하기라는 항목들을 적지도 많지도 않게 삽입하며 기호와 상호 텍스트적인 요소 찾기에 골몰하는 이 시대의 영화 애호가들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요소는 위에서 언급한 그런 재치 있는 지적 장난들은 아닙니다. 서사구조와 다양한 기호들 그런 요소들만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를 좌지우지하게 된다면 우리는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영화와 연극 사이의 구분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빌레뷰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바로 이처럼 흔히 영화를 읽는 행위를 서사적 분석을 통해 영화를 해체하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는 요즘 세태에 대해서 그것이 왜 중요한지 궁금해하는 저의 직감이 꼭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화와 드라마, 영화와 연극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그렇다면 영화를 가장 영화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다시 영화를 돌이켜 보면, 영화는 아주 단순한 스토리 (용도가 사라진 안드로이드를 찾아서 폐기해야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가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 되며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헤매다가 갑자기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행동을 실행하고는 최후를 맞게 되는)를 마찬가지로 단순하게 보이는 소수의 장면을 연결함을 통해서 거의 3시간에 가까운 아주 긴 러닝타임으로 늘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도 놓치면 안 되는 명작으로 만들어 내는데, 그것을 지금은 많이 잊힌 전통적인 영화 제작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주인공들의 밀도 높은 연기 (전편에 비해 액션이 많이 줄어들고 대사도 많지 않기에 대부분 표정으로 표현해 내는)와 캐릭터의 특징을 둘러싼 각 장면의 배경 연출이 한데 어우러지며 완성해 내는 완벽한 영상들이 바로 그것인데요, 


영화는 영화만의 고유한 장치와 방법을 통해서 그 스스로의 미적 가치를 찾아 나가야 할 것일 텐데요,

드니 뵐네브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천재성을 보여 줍니다.

이번 영화에서도 독창적인 시선으로 만들어 낸 영상과 그에 부합하는 소리(음악)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스토리 속을 걸어가는 캐릭터들이 매 순간 자신의 모습을 찾는 모습을 발견하게 하고 있습니다


 



3명의 캐릭터들이 동시에 참여하는 K와 조이의 섹스신을 떠올려 보면, 그 엑스터시의 지점을 중심으로(안타깝게도 뭔가 야릇할 수 있을 이런 순간은 영화에서 자세하게 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마치 안드로이드처럼 영혼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의 단절과 소외감을 그리고 틀에 갇혀 존재감이 사라진 채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진) 살아가는 의미 없는 소시민적 삶이 현대적인 건조함으로 그려지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과 동시대적인), 엑스터시의 지점을 건너기 시작하면 이런 무미건조한 철학을 위한 철학 같던 표정에 갑자기 따뜻한 피가 돌며 감성 어린 웃음(처음으로 영화에서 K가 미소를 띤 얼굴을 보여주는)이 피어나는, 그래서 시계의 바늘을 마치 200년 정도 뒤로 돌려 감수성 넘치던 낭만적인 시의 세기가 현대의 배경 위에 덧씌어진 가상현실 같은 장면이 포착됩니다. 


시간성, 관념성, 동시대적인 감정과 구시대적인 감정의 비교, 자아에 대한 각성과 존재에 대한 고찰 (아마 인터넷을 열심히 뒤진다면 이런 류의 표현을 한참 찾아낼 수 있을 텐데요) 등등과 같은 우리를 사고의 늪에 빠뜨리는 현대성들을 하나의 장면을 통해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전의 영화들 <시카리오> <어라이벌> 그리고 이 작품 이후의 영화인 <듄> 등을 관통하는 감독의 특징은 어떤 대단한 영상미의 장면을 만들어 내는 독창성도 있지만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함 속에서 그 속을 관통하는 다양한 생각들을 영상으로 치환해 내는 것인데, 대표적인 것이 <어라이벌>의 오프닝과 엔딩에 나오는 주인공의 집 천장을 흩어내리는 카메라 작업입니다. 매일 우리의 눈에 뜨이지만 인식하지 않던 대상인 거실의 천장을 바라본다는 것은 갇혀 있던 우리의 시선을 새로운 방향으로 돌려내는 영화 전체의 서사만큼이나 커다란 변화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일상의 소소함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색다른 시선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진 작은 장면들은 그 영화에 등장하던 거대한 장면들만큼이나 우리가 똑같은 하루들을 보내는 일상의 삶이라는 틀에 갇혀서 깨지 못하는 인식의 틀과 선입견을 발견하게  하는데 동일한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미 보셨던 분들도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다시 본다면 저 처럼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하게 되실 것이고, 아직 못 보신 분들 중에 뷜네브 감독의 팬이시라면 강추하는 영화입니다.!!

(디스토피아 영화의 새로운 전형을 찾고 계신 중이라면 그냥 넘어가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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