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밀란 쿤데라의 에세이집 <만남>을 들게 되었는데, 우연히 겹쳐 손가락이 가는 데로 펼친 장은 "7부 첫사랑" 중에서 '향수에 젖게 하는 최고의 오페라'편이었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평소에도 자신과 같은 나라 출신인 음악가 야나첵에 대한 애정을 과하게 드러내곤 했는데, 이전에도 여러 번 읽었던 이 글에서 저는 그가 <꾀 많은 새끼 여우 - The cunning little vixen>에 대하여 펼치는 독창적인 해석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던 이 글들 중에서 한 대목이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머릿속을 헤치더니 마침 어제 올린 <블레이드 러너 2049> 편을 쓰고 난 뒤에 머릿속을 웅웅 거리며 울리던 흐릿하고 막연하던 형체 없는 몽상들을 아주 명쾌하게 바로 세우고 구체적인 생각의 이미지로 다시 보이게끔 하고 있기에 너무도 즐거운 나머지 소개해 드리려고 책을 다시 폈습니다.
아메바처럼 꿈틀거리며 어디로 뻗어나갈 줄 모르던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은 그 현실적인 중요성에 있어서 아메바만큼이나 무시당하고 기억의 뒤편으로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어제의 잡념을 이렇게 우연히 그리고 이토록 정확히 집어내어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 너무나 신이 났는데, 저에게 명징한 한줄기 빛을 비춰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꾀 많은 새끼 여우>는 숲 속에서 일어나는 목가적 사랑에 대한 정경들의 단순한 모음이고, <죽은 자들의 집으로부터>는 도형수들의 삶에 대한 르포르타주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야나첵이 오페라 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이러한 줄거리와 서스펜스의 부족함을 얼버무리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점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는 결점을 강력한 카드로 변환했던 것이다. 오페라 예술에 필히 수반되는 위험은 음악이 자칫하면 단순한 삽화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사건의 전개에 지나치게 집중한 관중이 청중이기를 포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야나첵이 줄거리 구성을, 극적인 행동을 포기했다는 것은 오페라 내부의 '역학 관계'를 전복하고 음악을 근본적으로 전면에 내세우기를 원하는 한 위대한 음악가의 최고의 전략처럼 보인다"
제가 붉은색으로 바꾼 부분들이 바로 그것들인데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서사 역시 뚜렷한 스토리와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한 서스펜스가 부족하지요. 오페라 작곡가인 야나첵과 마찬가지로 감독은 이 부분을 보강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하고 느린 영상을 통해(거대하고 느리다는 점이 좋은 방향으로 해석되기 쉽지는 않지만) 점점 더 높은 담과 튼튼한 우리 속에 갇혀 버리는 현대의 우리가 미래의 우리를 바라보는 이미지들을 - 부속이 되어 버린 작은 존재들, 그리고 그 존재들이 품고 있는 회의와 희망, 기적(기존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계의 전복) - 아주 독특하게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뵐뇌브 감독은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연성 있는 스토리들이 뭉쳐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발전해나가며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그런 류의 영화 (어제 표현한 잘 만들어진 드라마들과의 경계가 애매모호한 영화들) 보다는 한 씬 한 씬을 새로운 장르의 예술로 만들어 나가는 신기함을 보여주는 감독이라고 생각됩니다.
밀란 쿤데라가 극찬한 야나첵의 <꾀 많은 새끼 여우>의 한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