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셴북이 영국으로 가더니
우리는 영국을 아직도 왕가가 존재하는 그래서 상당히 보수적인 나라로만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게이 문화가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비틀스와 퀸이 태어 난, 샌프란시스코 히피들의 원조인 그런 색다른 나라입니다. 보수적인 경향만큼이나 그에 반하는 자유로운 사상과 아이디어들이 넘쳐 나는 곳이지요.
거기에다가, 자신들이 만들거나 창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영국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 (대영제국과 영연방이란 시스템)을 통해 영국식 표준화를 해 내곤 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와인이 있습니다. 이제 와서 그 나쁜 날씨에도 불구하고 영국산 와인을 만든다는 이슈를 만들기도 하지만, 영국은 와인 생산과는 역사적으로 거리가 아주 먼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과거 백년전쟁 전까지 자신들의 영향력이 많이 미쳤던 보르도 지방을 세계 최고의 와인 생산지로 만들어 버리고, 와인 테이스팅 평가 방법을 그들 방식으로 표준화하고 (현재 우리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20점 시스템을 만들어서), 마스터 오브 와인이라는 자격증을 만들어 내서 영국 및 영연방 출신의 사람들이 와인업계를 좌지우지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마케팅에도 재능이 뛰어난 이 사람들은 그래서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이벤트도 곧잘 만들어 내곤 하는데, 그 유명한 "파리의 심판"도 한 젊은 영국인의 아이디어였습니다. (많은 분들은 캘리포니아 와인의 우수성을 알리려고 했던 미국의 시도라고 생각하셨겠지만). 이 이벤트를 통해 자신들이 키워왔던 유명한 프랑스 와인만큼 미국의 신생 와이너리들도 상품력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본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와인 유통 시장을 키워 나가려는 대표적인 이벤트였습니다.
방송에서도 X-factor와 브리튼 갓 탤런트 등을 만들어 낸 사이먼 코웰 같은 비즈니스 수완이 뛰어난 기획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기존의 경계를 허물어 내는 아이디어를 통해, 사이먼 코웰은 기획자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전 세계 연예 관련 부자 순위에 올라 있습니다.
서두가 많이 길어졌는데요, 이렇듯 가장 보수적이라고 믿어지는 이 영국이 어떻게 우리 사회의 지적 경계를 허물어 내고 있는가를 보여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미술이나, 건축 등에 관련된 예술서적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모두 알고 계시는 독일의 타셴이라는 출판사가 있습니다. 워낙 좋은 책이 많이 나온 출판사라 아주 오래된 전통이 있는 출판사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이 타셴은 1980년에 시작된 유럽 기준으로 보면 아주 젊은 출판사입니다. 이 젊은 출판사는 애플이 현재 하고 있는 애플스토어 같은 기획을 애플보다 무려 10여 년 앞서서 보여 줍니다. 유럽 각 나라의 문화 중심지에 이슈가 될 만한 자체 매장을 오픈하고 (각 매장의 인테리어를 , 오픈할 시점의 최고의 디자이너 또는 건축가와 협업을 통해 하나의 문화 이벤트로 만들어 버립니다. 젠틀 몬스터의 매장들에서 풍기는 예술의 향기가 타센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직영 매장에선 오직 타센에서 나온 책만을 판매합니다.
애플을 좋아하는 애플 덕후들에게 애플 스토어가 성지가 되는 것처럼, 예술과 디자인 건축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에게 타센 스토어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멋진 성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영국인들의 경계를 허무는 능력이 또 하나 나타납니다.
타센 영국 지사에서 새로운 책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는 데요, 그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 봐도 아주 혁신적인 사업모델이었습니다. 바로 Sumo book 시리즈입니다. 예술품 같은 책이면서, 책값으로 소장할 수 있는 예술품인 이 시리즈는, 책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큽니다. 그래서 상상을 초월한 덩치의 사내들이 벌이는 sumo를 시리즈 이름으로 한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위의 사진을 보면 얼마나 큰 책인지 아시겠죠? 소장본으로 만들어진 이 시리즈들은 각각의 시리즈 별로 그 책에 맞는 디자인의 북 스탠드도 별도를 제작을 했습니다. 책을 사면 세트로 받게 되는 거죠. 마치 부록 인양
사진기 삼발이처럼 전시대 위 부분의 책을 올려놓은 부분이 좌우로 회전을 합니다.
이 스모 시리즈의 첫 편은 헬무트 뉴튼이었습니다. 이 첫 작업이 대박을 치게 되면서, 이후 지속적으로 시리즈들을 만들어 내는데, 이후의 어떤 작업도 첫 번째 시리즈의 인기를 따라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책의 기본 콘셉트는 미술가의 주요 작품을 집에 두고 감상할 수 있게끔 아주 큰 ( 책의 사이즈가 50cm* 70cm이니 보려고 펼쳤을 때 가로가 1m에 달하는) 거대한 아트 서적입니다. 모두 판화 작업 수준 이상의 해상도로 프린트를 하고 종이 역시 판화 작품에 쓰이는 용지 퀄리티를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시리즈별로 첫 100권은 에디션 넘버를 붙여서, 수집가들의 욕구를 좀 더 자극하고 있습니다.
첫 시리즈인 헬무트 뉴튼 편의 에디션 판은 처음 나온 1999년 출시가가 미화로 2만 불이었습니다. 당연히 나오자마자 완판 되었고, 현재 경매에 나오는 얼리 버전들 (에디션 넘버가 낮은 경우)은 10만 불을 쉽게 넘기고 있습니다.
시리즈에 출간을 한 작가들은 모두 유명한 미술가나 사진작가였습니다. 원화나 사진 에디션 작품들 한 점의 가격이 책의 가격에 비해 어마 어마 하게 비싼 이 작가들의 작품을 거의 원작과 유사한 퀄리티와 크기로 (특히나 사진작품의 경우는) 내손에 줠수 있다는 기본적인 마케팅 콘셉트 자체가 뛰어나기도 했지만, 제가 보는 성공 요소는 약간 다른 데 있습니다. 만일 첫 번째 에디션이 데이비드 호크니로 시작했다면 이렇게 까지 엄청난 성공을 하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맞습니다. 첫 번째 시리즈인 헬무트 뉴튼 스모 북은 기존의 선입견과 가치관이 가지고 있던 작가주의라는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오타쿠 관점에서 소비자를 바라본, 색다른 출발이었습니다.
헬무트 뉴튼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라는 측면에서 20세기의 위대한 작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유명 패션 잡지들이 그와 작업을 하고 싶어 했고, 유명 셀럽들이 그의 카메라 앞에선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을 과감한 장면을 많이 연출하곤 했습니다. 그의 작품에 벗고 있는 여자 모델의 당당함을 가지고 누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도 하고요. 숨겨진 욕망을 양지로 끌어내 예술로 승화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 애호가는 이런 평론가들의 안목을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많은 뉴튼 호사가들이 뉴튼을 좋아한다는 말을 할 때는 (유명한 작가를 알고 있다는, 좋아한다는 허영심에) 이런 비평가들의 멋진 대사 몇 마디를 암기해서 써먹기는 하겠지만, 솔직히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여자 모델, 여자 배우들의 벗은 몸을 (그것도 천천히 나만의 시간을 즐기면서) 볼 수 있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뻔하면서도 쉬쉬해야 하는 오타쿠들의 입장을 아주 세련되게 배려한 게 바로 이 스모 북의 첫 번째 시리즈 아닐까요?
뉴튼의 작품을 사서 서재에 걸어 두는 것과, 뉴튼의 스모 북을 사서 하나하나 넘겨 보는 게 어떻게 다른지 한 번 상상해 볼까요?
사실 진짜로 내가 보고 싶은 건 이런 사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서재에 걸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타협을 하고 말지 누가 알까요?
이 정도도 과할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적당하게 타협점을 찾아야겠죠. 제 아무리 위대한 작가의 작품이라지만
또 이런 것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름다운 여성의 나체가 나의 서재 한 벽면에 걸려 있습니다. 나의 서재를 보러 온 사람들 한테 이게 포르노가 아닌 작품이란 걸 설명하려면 사진의 액자, 그 액자와 어울릴 벽의 장식, 벽면의 질감, 그리고 서재를 둘러싼 책장들이 작품과 잘 어울릴지, 그래서 보러 온 사람들이 내가 포르노를 걸어두는 저질 인간이 아닌, 뛰어난 작품을 걸어두는 안목이 있는 콜렉터로 보일지,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나의 많은 페르소나가 하마터면 잘못 튀어나오게 될까 봐 무척이나 걱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남의눈을 의식하면서 오타쿠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굳이 이래 가면서 뉴튼의 사진작품을 걸어 둘 만한 명분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뉴튼의 조그만 양장본 사이즈의 책을 사서 보는 것이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에서 헤엄치며 노는 것보다 오타쿠들에게 어떤 장점이 있을까요? 영국 타센의 기획자들은 바로 이 숨은 욕구를 정확히 읽어 내고, 헬무트 뉴튼의 스모 북을 기획한 것입니다.
내가 따로 신경 쓸 것도 없이 책을 사면 딸려 오는, 잘 어울리는 스탠드 위에 올려서, 서재의 한쪽에 잘 모셔둡니다. 솜씨 좋은 전기기사를 불러, 그 책을 잘 비출 수 있는 하이라이트 몇 개 정도를 추가하는 공사 정도의 노력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가 와서 막 열어보고 너 이런 사람이냐 라고 놀릴까 봐 걱정이 될 거라고요? 설마요, 여러분이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최소 2000만 원이 넘는 책을 본다면, 과연 자신 있게 그 페이지를 막 열어 볼 수 있을까요? 그냥 와하거나, 아님 속으로 별 이상한 이러고 말겠지요.
그러니까, 이 책의 소유주는 책 안에 들어 있는 작품들을 온전히 소요할 수 있게 됩니다. 책상 서랍에 잘 모셔둔, 자신만의 하얀 실크 장갑을 꺼내 들고 조심스럽게 천천히 손에 낍니다, 앞으로 다가올 충만한 시간을 즐기기 위해, 책상 옆 장식장에서 잔과 술을 꺼냅니다. 크리스털 잔에 좋아하는 코냑을 한잔 따르고, 잔을 손에 쥐고 천천히 굴려가며, 손의 온기를 통해 천천히 데워져서 살포시 올라오는 자극적인 달콤함을 즐기고 있습니다. 더 자극적인 달콤함이 기다리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나의 충만한 상상력이 코냑의 향기를 배가 시킵니다. 이윽고 잔이 비워지고, 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옵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책 앞으로 한 걸은 더 다가가, 책을 비쳐줄 하이라이트를 켭니다. 맛있는 어린 영양을 앞에 두고 있는 표범이 된 마냥, 나의 먹이를 천천히 찾아 나갑니다.
이런 얘기가 불편하실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많은 예술의 이면에는 이런 기본적인 인간의 욕망이 들어가 있습니다. 헬무트 뉴튼을 좋아하시는 그래서 이 얘기가 맘에 안 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오타쿠들 전에도 그는 위대한 작가였고, 이후의 역사도 그것을 증명할 테니까요. 제가 얘기하고 싶었던 건, 단지 우리에겐 인간적인 나약한 욕망들이 숨어져 있고, 이런 것들을 찾아내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위대한 작가들은 결국은 우리 안의 다양한 경계들을 무너뜨려 나가는 능력의 소유자들 이란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통해 보여지는 보편적 인간성이야 말로 진정한 예술의 표상일 테니까요.
타센 런던의 뛰어난 기획자들 앞에 천재적인 뉴튼의 작품들이 없었더라면, 스모 시리즈도 결코 태어날 수 없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