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을 보고
전주에 내려가면 비빔밥을 먹어야 합니다.
왜냐고요 그냥 모두 그러니까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 보니, 원래 전주에서 먹던 꽃처럼 화사하고 예쁜 비빔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기대하는 그럴싸 함이 들어간 비빔밥이 점점 대세로 자리 잡았습니다.
언제부터 왕과 양반 중 일부만 사용했다는 방짜가 비빔밥을 위한 전용 식기가 되었는지, 어쩌다 차가운 육회가 뜨거운 용기에 부딪혀 죄도 없이 온몸에 화상을 입어가며 짝퉁 불고기가 되었어야 하는지 좀 궁금하기는 하지만 이미 이렇게 대세가 되어 버렸으니 이제는 육회비빔밥의 원조가 전주냐 진주냐 이런 건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렸네요.
사실 아주 맛있게 고슬고슬한 밥을 지을 수 있다면(햇반의 맛을 따라갈 수 없다고 실토했던 이상한 수준 미달의 셰프와 달리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사실 꽤 맛있는 밥을 지을 수 있고 또 짓고 있습니다) 몇몇 야채와 (혹시라도 있다면 맛있는 나물무침이 있으면 훨씬 좋을 테고요) 그리고 예전처럼 풀어서 키워서 비린내가 없는 고소한 계란을 부쳐서 거기에 참기름과 간장 그리고 다시마 부각 조금을 섞어서 살살 비벼먹어도 아주 꿀맛일 겁니다.
그러니까 제 얘기는 아무리 맛있는 그럴싸한 재료를 잔뜩 넣은 음식이라도 그 재료들이 잘 어울리지 않고 핵심을 놓치고 있다면, 소박하지만 재료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한 본질이 잘 살아있는 음식이 더 맛있다는 거죠.
이번에 보게 된 '누구나 아는 비밀'은 아쉽게도 좋은 재료를 잔뜩 넣었는데도 뭔가 잘 어울리지 않아 보는 내내 아쉬움이 많이 남은 영화였습니다.
'페넬로페 크루즈'와 '하비에르 바르뎀' 콤비는 각자가 각각 영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 같은 중량감이 사라지고 그들이 처음 함께 등장했던 '하몽하몽'에서의 우스꽝스러운(어색하고 덜 성숙한 성적 매력) 모습이 떠 올라 어색했고 (여기서도 어색하고 덜 성숙한 어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혼식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즐거움과 박장대소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사건의 애절함과 긴박함이 균형감 있게 연출됐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산만한 편집 등이 눈에 거슬립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2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철학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을 포함한 더 큰 세계를 바라보는 매크로적인 관점과 우리의 주변에 좀 더 집중을 해서 그 안의 세부적인 디테일을 바라보는 마이크로적 관점입니다.
이번 영화는 바로 우리 주변에 집중을 해서 그 안의 디테일에 대한 묘사를 보여주고자 한 영화입니다.
이런 마이크로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들입니다.
이런 연결이 튼튼한지 또는 약한지를 묘사하기 위해 가장 적절히 사용되는 소재가 바로 불륜 막장일 텐데요,
영화에서도 납치당한 아이를 둘러싼 가족 그리고 좀 더 확장된 마을 사람들과의 연결에서 취약점을 찾아내 그 부분이 인간관계에서 또 우리가 사는 삶에서 어떤 의미와 양상을 띠는지를 보여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부분에 관해서 묘사한 완성도 높은 영화가 있습니다.
'마이크 리' 감독의 '비밀과 거짓말'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비밀과 거짓말에 대한 소재로 불륜 막장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밀과 거짓말'과 '누구나 아는 비밀'의 완성도를 구분 짓는 요소가 있습니다. 비밀의 공유가 어디까지인가라는 한 스토리의 경계에 대한 부분입니다. 비밀과 거짓말에서는 주요 비밀은 가족 사이의 비밀입니다. 그런데 한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가족 사이에 이 비밀 이외에도 많은 비밀들이 숨겨져 왔고, 그것들을 숨기기 위해 가족 구성원 모두가 얼마나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가 서서히 드러납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런 묘사들은 정확하게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의 삶과 괘가 일치하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숨겨야 할 비밀들이 생겨나는 (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과 사이에는 비밀이 크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서로 공유하고 알고 있어야 하는 사이에서 숨겨야 하는 비밀들이 생겨나는 거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과는 무언가를 숨기는 게 아니니까 말이죠. 그저 서로 상관이 없을 뿐이니 관심도 없고 그렇다면 숨길 것도 없죠. 숨기지 않더라도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을 테니 아무도 모르는 건 비밀과는 다르니까요) 우리를 둘러싼 작은 삶들의 진실들 말입니다.
이런 성격의 비밀에 대한 또 다른 수작은 '휴먼 스테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작가 '필립 로스'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 역시 '비밀과 거짓말'처럼 비밀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거짓말들이 어떻게 발전을 하며,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보편적 인간들이 하는 행동에 대한 솔직한 전형들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누구나 아는 비밀'에서는 비밀의 공유가 마을 전체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온 마을이 알고 있는데 당사자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비밀의 성격 자체가 위에서 언급한 다른 영화들과는 약간은 다른.
이렇게 설정이 되면 마을 구성원 전체의 관계와 연결에 대한 스토리가 필요할 텐데,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이 너무나 거칠고 인과관계에 대한 설정이 부족합니다. 영화에 들어가는 스토리가 반드시 개연성이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현실은 항상 초현실적입니다) 그렇다고 편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 사이의 다툼과 주인공의 딸이 유괴되어야 하는 이유 등이 불필요해 보이고, 연결도 부자연스러워서 영화를 상당히 지루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누구나 아는 비밀'은 황당스럽지만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과 그 본질이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실질적인 세계인 마을 안에서 발생하는 전체와 개인 간의 문제에 대한 충돌을 다루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감독이 그려내는 영화는 이 충돌들에 대한 초현실적인 문제 제기인 걸까요 아니면 그 충돌들을 해결해 나가는 인간들의 의지와 투쟁에 대한 오마쥬인 걸까요? 영화를 보고 극장 문을 나오는 내내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어느 쪽 하나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통해 알게 된 확실한 현실은 우리가 이 영화의 크레디트에서 이름을 내밀고 있는 거장 감독과 명배우들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 영화에서 제공되지 않고 있다는 슬픈 사실입니다.
영화에 대한 결론은 이상하게 영화의 제목으로 귀결되네요. Everybody knows but Director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던 아쉬운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