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미장센'
이 수식어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에 관한 설명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래서 이제는 스탠리 큐브릭 하면 반드시 따라붙는 관용어가 된 듯한 느낌입니다. 샴푸 이름과 명감독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나 하고 오해를 하기도 했던 이 미장센이란 단어는 “연극과 영화 등에서 연출가가 무대 위의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배열하는 작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 속의 장면들은 실외와 실내로 크게 분류할 수 있는데, 미장센을 이중 실내 장면에 국한하여 생각해 본다면 뛰어난 미장센은 바로 “실내 인테리어가 상당히 잘된”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뛰어난 미장센으로 유명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어떤 면에서는 뛰어난 실내 장식가라고 불리기에 손상이 없다는 뜻일 텐데요, 그의 다양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테리어와 가구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에서는 각각의 장면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영화의 전체 내러티브를 구성해 나가고, 장면마다 등장하는 다양한 세팅들이 극 진행의 이유와 배경 등에 대한 숨겨진 기호로 사용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Home'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영화의 세트가 내포하고 있는 기호들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원작에 대해 간단히 설명드리면 이 '시계태엽 오렌지’ (Clockwork Orange)는 영국의 소설가 앤서니 버제스가 쓴 1962년 소설입니다. 작가가 이런 독특한 제목을 붙이게 된 이유는 자신이 소설의 배경으로 삼고 있는 'East-end'라 불리는 런던의 지역을 중심으로 사용되는 Cockney(지리적인 이름과 동시에 그 지역에서 사용되는 특유의 악센트가 심한 런던 사투리)라는 언어의 속어 중에 Clockwork Orange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했고 그것의 이미지가 독특해서 제목으로 정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이 쓰인 60년대 초와 영화가 제작되는 70년대 초 사이에 영국 사회에 벌어진 어떤 현상 때문에 이 orange란 색상이 영화에서 더욱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바로 신호등의 변화인데요,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60년대까지 Red와 Green으로만 되어 있던 신호등이 60년대 말부터 하나를 더 추가한 3색 등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때 추가된 색이 바로 orange입니다. 신호등에 새로이 추가된 이 오렌지색은 신호가 바뀌는 것을 알리는 즉 warning sign(경고)의 역할을 해주는 것인데요, 이런 사회적인 기호체계의 변화를 통해 당시 영국인들에게 orange색상은 warning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전에 없던 새로이 추가된 기호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home' scene의 세트 인테리어를 오렌지 색상이 가지고 있던 기호를 중심으로 자세히 살펴볼까요?
주인공 알렉스와 그의 패거리들 이렇게 4명은 크게 한건을 한 후 흥분한 채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며 신나는 유흥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어두운 국도에서 로시니 '도둑까치 서곡'의 리듬에 맞춰 질주하는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커지며 화면을 점차 채워 나가더니, 이윽고 차에서 내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어디론가 다가갑니다
.
어두운 배경 속에 불빛이 신호등의 오렌지색처럼 warning 사인을 보내고 있습니다.
'HOME'이라고 선명하게 불이 들어오는 표지판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신경증을 엿보게 해 줍니다.
(이제부터 홈이야, 바로 그 홈이라고, 정신 차려 관객들아!)
그리고는 장면이 전환되며 'Home' 내부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서재(1)에서 한 남자가 타이프라이터로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장면의 인테리어 요소로는 작가인 알렉산더에 걸맞은 책장과 의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작가가 앉아 있는 의자는 Saarinen이 디자인한 arm chair입니다.
Leg 타입이 목재와 철재로 나누어져 있고, 상단부는 다양한 소재의 가죽과 패브릭의 선택이 가능합니다.
Saarinen은 위의 Tulip 시리즈로 유명한 핀란드 출신 디자이너입니다.
다음으로 장면에 등장한 책장을 볼까요?
이 책장은 철제 세로 지지대를 세우고 그 사이에 선반을 끼워 넣는 조립식 방법으로 쉽게 확장을 할 수 있는 실용적인 제품입니다. 작가가 사용하는 타이프라이터나 그의 집 거실 바닥이 원목마루로 되어 있는 점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고가의 가구가 보이는 점과 비교하면 이 책장은 그야말로 기능에 충실한 대중을 위한 가구입니다.
이런 스타일의 책장 디자인은 사실 50년대 후반에 처음 등장합니다. 스웨덴 브랜드인 'String'인데요, 폭발적인 인기를 거쳐 60년대 이후 많은 카피캣을 만들어 냅니다.
오리지널 제품은 이름 그대로 굵은 강철 실 모양의 철제 프레임을 사용하는데, 영화에서는 사각 철제 기둥이 사용된 걸로 봐서는 '스트링'사의 제품은 아닙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감독 본인의 고급 취향(?)과 다른 당시의 대중 지향적인 문화에 걸맞은 가구 하나를 선택하는 데, 바로 이 책장이었습니다.
책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라는 기호를 담고 있는 용기를 이렇듯 범용적인 제품으로 선택한 것을 보면 (오리지널 스트링도 범용적인 상품인데 그 콘셉트만을 취한 더 일반적인 책장을 고르고 있는 건) 최고의 제품만을 선호하는 감독의 덕후스러운 안목과 달리, 감독이 '지식'이라는 개념을 얼마나 보편적이고 민주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장면(1)에서 카메라는 수평적인 움직임을 오른쪽으로 이동을 하며, 천천히 'Home'의 내부(2)를 비춰 냅니다.
벽체 기둥을 중심으로 공간은 왼쪽의 서재와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오른쪽(3)으로 나누어집니다.
이 계단에는 미래주의적인 디자인 요소를 담고 있는 Pod chair가 보이며 아래쪽의 Pod chair안에 그의 와이프가 선홍색 의상을 입고 책을 읽고 있습니다.
원형으로 이루어져 뚜껑이 달려진 이 의자는 2가지 시제품 형태가 영화에 사용되고 있는데요,
계단 상단에 보이는 블랙과 레드 투톤으로 이루어진 의자는 의자 본체와 의자 커버가 거의 1:1 크기를 이루면서 heart의 형상을 띠고 있고, 아래에 의자는 원형 우주선에 뚜껑이 열린 안으로 사람이 앉는 형태의 디자인입니다.
상단의 하트 모양 의자는 감독과 주연 배우가 찍은 자료 사진을 통해 좀 더 자세한 모양을 볼 수 있는데요
위에서 보는 모습은 하트보다는 권투 글러브 2개가 포개져 있는 모양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이미지는 카메라의 높이와 같은 위치에 수평적으로 놓이면서 하트의 형상을 보여주는데, 의자 위에 걸린 하트 형상의 조형물과 함께 'Home 이란 Heart가 머무는 곳'이라는 상징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독특한 의자들은 디자이너이면서 아티스트였던 Roger Dean의 디자인에서 탄생하는 데, Roger Dean은 Royal College of Art 재학 시절, Hille Furniture라는 당대 영국 최대 가구회사의 지원을 받는 4명에 뽑히면서 Hille을 위해 Urchin이라는 고슴도치 모양의 미래 지향적인 의자 디자인을 선보입니다.
이 디자인은 곧이어 탄생하는 빈백의 시초인 이태리 Zanotta사의 Sacco의 디자인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Urchin pouf라는 의자 장르가 만들어지기도 하죠.
디자이너 스스로는 자신의 디자인 콘셉트를 가지고 동생인 Martin Dean과 함께 retreat Pod란 conceptual 상품을 만들기도 합니다.
뭔가 에일리언에 나올법한 디자인 아닌가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이런 당대의 혁신적인 디자인들을 자신의 영화에 투입하여 아무도 해내지 못하는 차별화된 미장센을 선보이곤 했는데, 이런 모습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주정거장에 위치한 Hilton호텔의 로비에는 당시 유행을 선도하는 우주 스타일의 가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프랑스 디자이너 Olivier Mourue가 디자인한 미드 센추리 모던의 대표적인 의자 시리즈 Djinn이 바로 그것인데요, 이 Djinn이라는 이름은 모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이슬람 신화에 등장하는 지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네요.
이렇듯 시대를 앞서는 가구 디자인을 선보이던 감독은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프렌치 앤틱 가구를 선보이는 데, 미래적인 세팅 위에 우아하고 도도한 클래식 가구를 배치해서 동일한 공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세트입니다.
현재는 상업 공간의 인테리어에 많이 적용되는 라이팅 박스가 60년대 당시에는 아주 미래적인 요소로 여겨졌을 것 같은데, 이런 감독의 창의력은 또 다른 SF영화에 차용되고 있습니다.
바로 영화 <트론:레거시>인데요, 21세기의 영화이다 보니, 라이팅 박스 위에는 전 세기(20세기)에 등장한 미드 센추리 모던 디자인인 바르셀로나 체어와 임스 라운지체어를 통해 큐브릭의 영화에서 19세기의 가구를 등장시킨 장면을 오마주하고 있죠.
이 처럼 가구와 인테리어에도 아주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멋진 인테리어에 대한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