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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Jan 02. 2020

1920년 파리, 최고의 거장들이 보여주는 올스타전

스트라빈스키, 피카소 그리고 풀치넬라

19세기 격동의 시기를 겪은 유럽은 19세기 말부터, 정치적 안정과 제2차 산업혁명을 거치며 기대에 찬 20세기로의 변환을 시도하는데, 그중에서도 파리는 1900년 열린 만국 박람회를 기점으로 경제와 문화에 있어 발전을 가속하기 시작하며, 전 세계 문화의 수도라는 독특한 위치를 구축하고, 예술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됩니다.


유럽 전역으로 퍼진 산업혁명은 기술 발전을 촉진시키고, 이런 기술 발전을 통해 새로운 개념의 혁신적인 제품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당시의 신기술이 들어간 제품들은 생산에 쓰이는 중간재 형태의 기계장치보다는 새로 등장하는 부르주아지 등 신흥 자본가들을 위해 만들어진 소비재 상품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이런 새로운 상품들은 시장의 인기를 끌며 상품을 출시하는 사업가들을 또 다른 자본가로 탄생시키고, 다시 이들 자본가가 새로운 기술에 투자하여 자본주의의 선순환을 만들어 내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죠.


이런 풍요로움은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 점점 더 많은 예술가들이 몰리게 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부와 예술 그리고 새로운 기술들이 합져저 아름다운 시절, 즉 '벨 에포크'의 시대가 시작되게 됩니다.


이렇게 모여드는 자본가들과 예술가들의 결합은 문화 시장에서도 새로운 문을 열게 되는데, 이전 시대까지 문화 시장의 주 소비자였던 귀족들의 보수적이고 아카데믹한 취향과 달리 새로이 등장하는 소비자들은 상대적으로 이국적이며 새로운 예술적 요소가 담긴 문화 상품을 원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의 파리에서는 러시아 출신의 디아길레프가 러시아의 음악과 미술들을 소개하며 문화계의 중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는  "발레 뤼스"를 설립하여 파리 공연문화계의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한명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발레 뤼스"는 드뷔시, 라벨, 사티 등 프랑스 출신 작곡가들의 발레 공연도 많이 했지만, 새로운 시장에 걸맞는 새로운 작품들을 도입하고자 노력하는데, 이런 디아길레프의 열정으로 새로운 러시아 스타 작곡가가 탄생합니다. 바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입니다.


<불새> (1910), <페트루시카> (1911) 를 연달아 성공시키며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한 이 젊은 작곡가는 하지만 <봄의 제전> (1913) 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물론 이 <봄의 제전>은 현대에 와서는 그의 가장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원시적인 리듬과 타악기를 연상케 하는 거친 현의 움직임, 그리고 충격적일 정도의 불협음을 만들어 내는 관악기의 사용 등으로 드뷔시 등이 만들어 낸 감성 위주의 표현주의 음악 스타일에 익숙한 파리 공연 음악 시장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죠. 발레의 스토리 역시 고대 러시아의 원시적인 종교적 제례를 담은 것으로 당시 청중들의 보편적인 감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봄의 제전>

https://www.youtube.com/watch?v=EkwqPJZe8ms



하지만 1914년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이 휩싸이게 되었고, 다시 평화가 찾아온 1920년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에게 이전과는 다른 색다른 요청을 하게 됩니다. 


전쟁이 막 지나간 이후 유럽은 경제적인 침체와 정서적인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이런 시기적 특징으로 유럽 전역에는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던 이태리의 고전 코미디 극인 Commedia dell'arte "comedy of the profession"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는데, 디아길레프 역시 시장의 흐름에 부합하는 새로운 발레 공연을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차에 디아길레프는 우연히 18c 페르골레지가 작곡을 한 미완성 곡등의 악보를 발견하게 되고, 자신이 찾아낸 페르골레지의 음악들을 (당시에는 모두 페르골레지의 곡으로 알고 있었다고 하며, 이후 연구를 통해 페르골레지와 다수의 동시대 이태리 작곡가들의 작품들로 판명되게 된) 스트라빈스키에게 건네며, 이 음악을 기본으로 해서 18세기에 유행했던 Commedia dell'arte의 대표 캐릭터인 풀치넬라 스토리  Quatre Polichinelles semblables ("Four identical Pulcinellas")에 기반을 둔 발레 음악의 작곡을 부탁하게 됩니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작품이 바로 <풀치넬라>입니다. 


풀치넬라는 나폴리 인형극에 나오는 정형적 인물입니다. 즉 그 문화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금방 이해가 되는 확실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죠. 우리의 마당놀이도 이런 정형적 인물들을 바탕으로 다양한 스토리 변주가 생겨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풀치넬라는 자기 주변의 대부분의 문제들을 희극적인 코드를 바탕으로 해결해 주는 인물이며, 영국의 전통극인 "Punch and Judy"에서 Punch의 캐릭터가 바로 이 풀치넬라의 기본 성격에서 차용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시대가 흘러도 그가 가진 캐릭터의 외형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현재를 비판하더라도 과거의 프레임에 담겨져 있으니 검열등에서도 약간은 자유스러웠을 것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불편함도 훨씬 줄어들겠죠. 

동시대의 문제를 우리 주변의 인물들 같은 주인공들이 나와서 보여주는 리얼리즘은 우리를 훨씬 아프게 하지만 찰리 채플린의 영화처럼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주인공들이 나와서 보여준다면 그 순간에는 웃어 넘길수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동시대의 이야기를 과거의 그릇에 담아내는 방식은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 항상 소비자의 선호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곤 합니다.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판타지 사극이라는 장르만 생각해 보더라도 현대적인 감각의 스토리를 과거라는  틀 속의 의상과 무대를 통해 완성시킴으로써 현실도피와 노스탤지어라는 관객의 공감 요소를 쉽게 이끌어 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암울한 역사를 지나 침울해지고 피폐해진 당시 파리의 시대적인 상황을 생각해 보면, 유쾌한 내용을 담은 익숙하고 밝은 분위기가 훨씬 대중들에게 어필을 할 것이라는 생각 역시 이 공연 기획의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1920년의 <풀치넬라> 는 18세기의 인기 있는 소재와 18세기식 음악이라는 변수를 가지고 익숙함과 유쾌함이란 입증된 성공 방정식에 대입하여 전쟁 이후 침체되어 있던 1920년의 파리 관객들에게 선보이려 한 것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O_vro86erg4


18세기의 음악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리듬과 관현악 작법에 있어서 20세기의 모습을 투영시킨 이 작품은 

그의 기존 작품과는 사뭇 다른데, 우아함과 활력이 넘치며, 군데군데 차이코프스키 또는 무소르그스키 등의 느낌을 주는 부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러시아 낭만주의의 세련됨과 러시아 민족음악만의 고유의 리듬과 멜로디 등이 잘 어울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 입문자용으로도 충분히 즐거움을 주는 곡이라 생각됩니다.


동영상에서 보이는 것처럼 주인공 풀치넬라는 나풀거리는 흰색 의상과 얼굴을 반쯤 가린 가면을 쓰고 등장합니다.  이런  해학과 풍자가 담긴 가면극 등은 기존 구체제에 대한 반동이 심해지던 사회에서 많이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죠. 이런  세부 요소들 역시 아마도 전쟁을 겪고 난 이후의 대중들에게 어필을 하리라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풀치넬라>의 프로젝트를 위해 디아길레프는 또 다른 스타 한명을 참가 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피카소 입니다. 피카소는 이 공연의 의상과 무대 디자인을 담당하게 되는데요, 아래 그가 스케치한 의상과 무대의 모습을 한번 둘러 보시죠

 

Picasso 1920


Picasso 1920

피카소는 "발레 뤼스" 작업을 위해 장 콕토와 함께 이태리를 둘러보고 <풀치넬라>의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 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그는 이 이태리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에서 고전주의 시대까지의 미술에 대해 많은 이해를 하게 되며, 1920년을 기점으로 몇 년간 신고전주의의 틀에 맞는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의 엄마와 아기를 그린 1921년 작품이 바로 이런 시기의 대표작품입니다.


picasso 모자 1921


음악 작곡의 주요 모티브가 되었던 페르골레지는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많은 인기를 끌던 작곡가는 아닙니다. 사실 거의 잊힌 작곡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었는데, 1985년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LSO (London symphony orchestra)의 녹음을 통해 음악팬들의 핵심 리스트에 등재되기 시작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MR63GfUnMw



당시 불기 시작한 원전악기 연주 등의 흐름과 다시 재조명되던 바로크 및 르네상스 음악들과 함께 페르골레지의 <Stabat Mater> (슬픔의 성모로 주로 소개되며 기본적으로는 가톨릭 교회의 `성모 일곱 가지 슬픔의 날'(9월 15일)과 수난 주일(主日) 후의 금요일인 `일곱 가지 괴로움의 기념일' 미사에 사용되는 음악)는 음악 애호가들의 기억에서 잊힐뻔한 위기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이 음반은 그라모폰지의 엄청난 지지를 통해 아바도가 왜 당시 새로운 거장으로 부상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잊혀져 가던 무소르그스키의 <호반시치나>, 슈베르트의 <피에라브라스> 슈만의 <괴테의 파우스트에 관한 장면> 등 다수의 명곡들을 재발굴해 내는 열정을 보여줍니다. 



다시 <풀치넬라>로 돌아와 보면, 결론적으로 이런 18세기의 감성을 담은 음악 코드가 세계대전 전의 사회 상황과 달라져있던 1920년 파리 고객들에게 "향수"와 "익숙함(또는 친근함)"이란 요소로 어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디아길레프의 판단은 스트라빈스키라는 위대한 음악의 거인을 만나서 기획 의도를 훨씬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게 되죠.


스트라빈스키가 후일에 남긴 풀치넬라에 대한 회고입니다.

"Pulcinella was a huge success –one of those productions, where everything harmonizes, where all the elements―subject, music, dancing, and artistic setting―form a coherent and homogeneous whole.”


이런 경험을 통해 스트라빈스키 역시 음악계에 있어서 신고전주의라는 새로운 경향을 선도하게 됩니다.


예술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많은 위대한 미술가와 음악가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영향을 받은 일들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처럼 두 명의 거장이 한 작품을 같이 하게 된 경우는 무척이나 드물다고 할 수 있는데요, 과연 어떠한 배경들이 이 두 거장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의 협업을 이끌었을지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Stravinsky and Picasso do have in common : 


미술과 음악이라는 서로 다른 장르의 이 두거장이 이렇게 한 작품을 통해 신고전주의라는 공통된 분모를 갖게 된 것은 단순히 한 작품을 같이 해서가 아닙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속에는 Bach, Verdi, Tchaikovsky, Monteverdi, Pergolesi, Mozart and Russian folk music 등의 전통이 그의 음악적 언어를 통해 재해석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피카소의 그림 속에는 위대한  El Greco, Velázquez, Delacroix, Manet, 와 Van Gogh 등의 숨결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예술적 성장 배경이 <풀치넬라>를 기점으로 해서, 각각 신고전주의라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놓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요?



portrait of sravinsky



<풀치넬라>를 위해 함께 작업한 두 사람은 우리가 흔히 이런 종류의 천재들에 관해 가지고 있는 까탈스러운 면이 서로에게 작용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함께 작업한 기간에 피카소가 스케치한 스트라빈스키의 초상화입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 초상화를 꽤 마음에 들어한 것 같습니다. 음악가가 훗날 밝힌 에피소드에 의하면 2차 대전 기간 중 로마에서 연합군에 의해서 짐 수색을 당한 스트라빈스키는 군인들이 이 그림의 정체를 물어보았을 때, 피카소가 그려준 초상화라고 하는데, 스트라빈스키는 몰라본 군인들도 유명한 거장 피카소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스트라빈스키의 말을 믿지 않으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로마에 있는 영국 대사관에 보내야 했고 훗날 외교행낭을 통해 파리로 보내져 다시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Friendship


그들이 함께 한 1917년 나폴리의 많은 일화들은 이들이 얼마나 의기투합해서 젊음과 예술적 영혼을 불태웠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의 초상화 이외에도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소품을 위해 피카소가 스케치한 것으로 알려진 다음 그림은 이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서로에 기대어 그들의 예술 정신을 지켜 나간  우정의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선 그리기로 완성된 두 친구의 우정을 담은 피카소의 스케치는 자세히 보면 중앙에 자리 잡은 악기가 마치 높은 음자리표처럼 보입니다. 


이런 그들의 공동작업에 대한 추억인지 공동작업을 한 다음 해 가족들과 파리 근교에 머물던 피카소는 본래 그의 입체파 화풍으로 돌아가 <풀치넬라>의 주인공들을 모티브로 삼아 새로운 작품을 완성시킵니다.


Picasso: 세 음악가 (1921)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음악가들은 모두 <풀치넬라>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모티브로 작업이 되었고, 원래 그의 작업의 핵심인 큐비즘적인 요소로 완성되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넘버 3>란 영화가 떠오르는데요, 이제는 최고의 배우들이 되었기에 다시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송강호, 최민식, 한석규가 등장했던 이제는 한국 영화사의 고전이 된 작품인데요, 지금 다시 이 슈퍼스타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한국판 오션스 11 같은 시리즈가 될텐데요. 


이렇듯,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또는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스트라빈스키와 피카소의 이 황홀한 조합이 만들어낸 <풀치넬라>는 이 두 거장의 올스타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예술의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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