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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Mar 22. 2020

브르크너 혹은 말러, 틸레만 혹은 페트렌코

작품의 초연 이후 말러는 많은 고민 끝에 2악장에 Andante를 그리고 3악장에 Scherzo를 고정시켜 연주를 해왔다고 하는데(초연 당시에는 scherzo가 2악장 입니다)  말러 사후에 여러 음악학자들 사이에 이 중간 악장들의 순서에 대한 이견들이 발생하며, 많은 지휘자들이 양분되어 누구는 느린 악장을 2악장에 그리고 누구는 스케르초를 2악장에 넣어서 지휘하고 있습니다. 


작곡자 스스로도 많은 혼란을 겪었다고 하는 이 중간 악장의 순서는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제 생각은, 중요한 점은 지휘자가 2악장에 안단테를 배치했다면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전체 곡해석에 포함되어 있다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말러의 음악이 갖는 신비함이나 다양함을 볼 때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하고, 자신이 내린 해석에 대한 전체적인 일관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지 이게 옳고 저게 틀린 문제는 아니라고 보며 (작곡자 스스로도 고민이 많았던 부분인데)

만약 이 동영상의 지휘자인 키릴 페트렌코처럼 (아바도 사이먼 래틀 등 전임들이 이 순서를 고집했으니 아마 반대로 하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요) 2악장에 안단테를 배치한다면, 진격의 1악장 (혼돈 속의)을 거쳐 점차 자연에 목소리를 기울이는 2악장의 음악 속 화자가 자신의 내면에 담겨있는 의심들에 관해 고민을 시작해서

3악장과 4악장으로 넘어가면서 결국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것을 통해

나약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개별자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깨달음은 결국 삶의 고통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회피하거나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결국 비극적인) 것일 테고요.

이런 해석이 좀 더 말러의 시대를 관통했던 새로운 사상과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일상의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나빠지라는 법은 없는지라, 유럽의 많은 콘서트홀과 오페라하우스가 문을 닫는 바람에

시작한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가,  이 힘든 상황에 큰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도 베를린 필의 스트리밍 사이트인 digitalconcertohall.com 에서 이것저것 고르다가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지휘한 브르크너 <교향곡 4번 로만틱>을 보게 되었습니다.


https://www.digitalconcerthall.com/en/concert/2537#


밴드 페이지에서는 소개했는데, 현재 다양한 연주회장의 디지털 콘텐츠를 무료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and.us/page/78343606/post/67


틸레만의 지휘 스타일은 관객 입장에서 참 알아보기 힘든 지휘자입니다. 지금 이 사람이 up을 하는 건지, down을 하는 건지, 지휘봉은 자신의 허리와 어깨 사이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고, 혼자서 얼굴에 있는 데로 힘을 주고는 손이 올라오다가 내려가고 그냥 그 자리에서 꿈틀거리고.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그 역시도 자신의 지휘 스타일이 좀 더 세련되면 좋겠다는 말을 인터뷰에서 자주 언급하곤 합니다. 



어쨌건 실황에서 이 지휘자를 직접 본 적은 없는지라, 동영상과 녹음을 통해서만 접하고 있는데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은 독일식 낭만주의 속에 자라난 청년 같다는 느낌이 많습니다.


바그너의 <파르지팔>에 나오는 주인공 '파르지팔'같은 느낌이랄까요?

아주 맑고 깨끗한 그래서 순수하지만 반대로 보면 약간은 나이브한, 

그러면서 질풍노도와 같은 감정의 흐름을 꿈꾸는 몽상가 같은 

(도스토옙스키가 그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독일 사람들을 어리석은

몽상가라고 부르고 있는데, 좋게 해석하면 순진한 낭만주의자 아닐까요?)


그래서인지, 그의 레퍼토리에 바그너와 브르크너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꽤 많은데, 

말러는 연주를 거의 않고 있습니다. 



말러와 브르크너는 왜인지는 몰라도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한 세트로 많이 묶여서 취급되는데요

말러를 좋아하면 브르크너도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비슷하게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두 작곡가 작품을 다 즐겨 듣는 편인데, 솔직히 개인적으로 말러의 작품보다는 

브르크너가 좀 더 편안하게 다가옵니다.


일단 브르크너가 말러보다 덜 세련(?)되게 느껴진다고 할까요?

쉽게 말하면, 원초적인 감정에 훨씬 호소력 있는 음악으로 다가오는 것이죠.


듣는 취향에 따라 반대의 경우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만, 

말러처럼 감정선의 미묘한 부분을 이지적으로 음악에 내포시키는 경우에는,

그 내러티브를 읽어내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기 시작하며, 이 부분이 저에게 있어서

편안하게 음악을 듣는 것을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생각(사고)이 자꾸 개입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말러의 음악에 있서는 pause와 slow tempo가 무척 중요한 것 같습니다.

브르크너는 그에 비해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 제가 좋아하는 브르크너가 

아마추어 같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불안한 상황 속에서 cheer-up을

시키며 훨씬 씩씩하게 음악을 끌고 나가고 있습니다. (그의 현들은 종종 정확한 위치를 

잃어버린 느낌을 주며, 혼돈 속에 관과 총주를 이뤄나가다가 결국 관과 타악기의 등장으로

상황을 정돈해 나가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감정의 기복도 말러에 비해서는 적은 편이고, 다양한 주제들이 교차하며 등장하고

그것들이 하나하나 음악적 기호로 의미를 같고 있는 그런 복잡함도 훨씬 적습니다.

(그래서 전문가가 아닌 애호가인 제 기준에 좀 더 편안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크리스티안 틸레만 역시 한 인터뷰에서 

"왜 말러 연주를 잘 안 하는지?"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말러의 음악은 어떻게 한발 물러서야 하는지를 아는, 그리고 음악 속 미묘한 부분들에 대한 해석이 뛰어난 그런 지휘자에게 어울린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신도 그런 부분을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와 함께 말이죠.

카라얀의 부지휘자 경력이 있음에도, 그는 확연히 다른 노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카라얀은 훨씬 세밀한 부분에 대한 묘사가 뛰어난 지휘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의 <카르멘><투란도트><돈 지오반니> 녹음들이 이런 그의 욕심 탓에 대중이 원하는 바와 많이 다른

지점에 도달해 있기도 합니다.


어쨌건 이런 틸레만 스스로가 밝히고 있는 음악성에 대한 약점(?) 때문인지, 그간 그가 이루어낸 커리어에 비해 베를린 필 같은 다채로운 사운드를 과시하는 교향악단과의 공연 횟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 것 같습니다.


동영상으로 돌아가서, 감상했던 브르크너 <교향곡 4번 로맨틱>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 보면,

이곡에 붙은 부제인 '로맨틱'은 작곡자 스스로가 붙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작품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악장의 시작은 희미하게 밝아오는 여명처럼 고요한 현의 트레몰로로 시작합니다. ( 이 트레몰로로 연주되는 현은 브르크너 작품의 주요 특징 중 하나입니다) 약간은 불안한 듯이 떨리고 있는 현들 사이로 혼이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려는 듯 갑작스럽게 제1 주제를 연주하며 등장합니다.

현이 좀 더 커진 음량을 가지고 안정감을 찾으며 서서히 하강하는 동안 관들이 하나 둘 등장해서 총주로 점진적인 상승을 하며 자신감 넘치는 제2 주제로 넘어갑니다.

 작품 전반에 걸쳐 음악은 우리의 감정을 심오한 고요의 사원으로 가라앉히고 그러다가 격정이 넘치는 풍랑의 대양 위로 날아오르게 만듭니다. 이를 통해 불안, 흥분 그리고 즐거움을 동시에 반복적으로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곡자는 자신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1악장의 혼은 충만하게 잠을 자며 보낸 밤이 지나고 새로운 날이 밝음을 알리는 신호이고, 2악장은 노래들이며,  3악장은 숲 속에 들어간 사냥꾼들의 흥겨운 음악적 유희라고 

적고 있습니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1악장의 혼은 타운홀에서의 흥겨운 하루가 시작됨을 알리고 2악장은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 그리고 3악장은 숲 속에서 사냥꾼들이 먹는 식사를 묘사했다고 밝히기도 합니다.


 또 다른 음악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 로맨틱 교향곡은 중세도시에서 아침을 알리는 시청의 종소리에 도시의 성문이 열리고 말에 탄 기사들이 그 열린 문으로 숲 속을 향해 돌진해 나갈 때 숲에서 들리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교향곡 연주에서 시작 부분의 혼 독주는 상당히 중요한데, 영상을 보고 있노라니

이번 연주의 1악장의 시작을 알리는 혼 독주가 마치 진격을 알리는 군악대 나팔 소리 같은

느낌이 들면서, 얼마 전 보았던 <조조 래빗>의 한 장면이 연상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QGx6i7tAfA


1:45초 경부터 주인공 조조의 머릿속에 살고 있는 상상 속 친구 아돌프가 조조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점차 흥분이 고조되는 조조는 드디어 신이 나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잊어버린 채 용기를 얻어

거리를 뛰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느낌이 제가 말러보다 브르크너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브르크너를 다 듣고 나서는 새로이 상임지휘자가 된 키릴 페트렌코가 지휘하는 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을

골랐습니다. (엄청난 호사입니다)


https://www.digitalconcerthall.com/en/concert/52522#


연주시간이 총 88분에 달하는 이 거대한 교향곡은 말러의 작품 중에서 가장 미스터리 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대체적으로 3가지 정도 이유가 호사가들 사이에서 구전되고 있는데,


첫째는 작품의 제목에 '비극적'이란 부제가 붙는 이유입니다. 

말러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알려진 1903년경 작곡을 시작해서 말러에게 비극이 시작되는        1907년 이전에 작곡이 마무리되었는데 왜 가장 행복한 순간에 '비극'을 떠올렸을까라는 이야기들 말러를 

좋아하신다면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요, 


해외의 자료들을 찾아보면, 우선 말러 스스로가 이 부제를 붙인 증거를 찾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처음 출판된 악보에도 이런 내용이 없으며, 말러 스스로가 초판 악보에 대한 수정을 요구한 적이 있지만

그때도 이런 부제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고 하죠. 사실 그의 부인인 알마가 말러 사후에 말러가

이곡을 '비극적'이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와전되었을 확률도 높습니다.


하지만 전체 곡을 듣고 나면, 이 교향곡에 '비극적'이란 단어가 부제로 붙는 것이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격렬한 행진곡 느낌이 많이 등장하는 1악장을 통해  문제들을 제기하면

2악장의 안단테 (이 부분은 두 번째 논란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가 등장하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보여주는 듯한 목가적인 선율이 1악장에서 촉발된 흥분을 (무지함으로 인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암시하는 듯한) 잠시 가라앉혀 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스케르초의 3악장에서 불안한 미래에 대한 확신이 점점 강해지며,

4악장의 피날레에서는 처절한 투쟁과 패배를 암시하는 '비극적'인 음악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렇듯 음악적으로 '비극적'이란 단어가 그리 이상하지는 않지만, 베를린 필의 연주에서는 이 부제가 빠지고

그냥 교향곡 6번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굳이 부제를 넣어 이 작품을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 곡에 이런 부제가 어울리는 이유는


이 교향곡은 위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88분의 거대한 장정입니다. 합창과 독창이 들어가 있던 2,3,4번을 지나 순수한 오케스트라 곡인 5번을 넘어 말러 스스로도 음악적으로 훨씬 완성도가 높아졌다고 생각하는

6번에서, 작곡자는 아마도 본인 스스로 자신이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 관한 거대한 서사시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며, 이 당시 독일의 사상계가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간의 삶' 자체가 하나의 큰 비극이라는 시대적 사고를 음악적으로

완성시킨 작품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2악장과 3악장의 순서에 관해서입니다.


작품의 초연 이후 말러는 많은 고민 끝에 2악장에 Andante를 그리고 3악장에 Scherzo를 고정시켜 연주를 해왔다고 하는데(초연 당시에는 scherzo가 2악장 입니다)  말러 사후에 여러 음악학자들 사이에 이 중간 악장들의 순서에 대한 이견들이 발생하며, 많은 지휘자들이 양분되어 누구는 느린 악장을 2악장에 그리고 누구는 스케르초를 2악장에 넣어서 지휘하고 있습니다. 


작곡자 스스로도 많은 혼란을 겪었다고 하는 이 중간 악장의 순서는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제 생각은, 중요한 점은 지휘자가 2악장에 안단테를 배치했다면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전체 곡해석에 포함되어 있다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말러의 음악이 갖는 신비함이나 다양함을 볼 때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하고, 자신이 내린 해석에 대한 전체적인 일관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지 이게 옳고 저게 틀린 문제는 아니라고 보며 (작곡자 스스로도 고민이 많았던 부분인데)

만약 이 동영상의 지휘자인 키릴 페트렌코처럼 (아바도 사이먼 래틀 등 전임들이 이 순서를 고집했으니 아마 반대로 하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요) 2악장에 안단테를 배치한다면, 진격의 1악장 (혼돈 속의)을 거쳐 점차 자연에 목소리를 기울이는 2악장의 음악 속 화자가 자신의 내면에 담겨있는 의심들에 관해 고민을 시작해서

3악장과 4악장으로 넘어가면서 결국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것을 통해

나약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개별자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깨달음은 결국 삶은 고통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회피하거나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결국 비극적인) 것일 테고요.

이런 해석이 좀 더 말러의 시대를 관통했던 새로운 사상과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3번째는 해머의 문제입니다.

<교향곡 6번>에 등장하는 해머 문제는 언론이 아주 좋아하는 이슈입니다. 몇 번째 마디에 해머를 쳐야 하나,

몇 번을 쳐야 하나, 무엇으로 그 소리를 만들어야 하나, 해머만 치나 아니면 그 부분에서 

나머지 타악기들이 모두 참여해 훨씬 더 효과를 극대화해야 하나 등등


이 문제에 관한 제 개인적인 견해는 너무도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이슈를 위한 이슈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해결책은 중간악장 문제와 마찬가지로 각 지휘자들이 자신들의 음악적 견해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것일 겁니다.

아마도 저라면, 가장 적은 횟수로 가능한 눈에 덜 띄게 사용하고 싶습니다.

이 88분에 달하는 음악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우주 속에서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미미한가를 생각해 본다면,

이런 인간 개개인들에게 음악 속에서 특정 효과를 부여하고자 하는 해머 소리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이 말러의 <교향곡 6번>을 듣다 보면, 수십만 평의 대지 위에 지어진 필립 존슨의 <글라스 하우스>에 

사는 super rich인 누군가가 자신을 둘러싼 안락함과 자연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호사 속에

뭔가 자신에게 들려오는 알지 못하는 불안을 감지하기 시작하며, 점차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게 되고

결국 삶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듯한 영화 같은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자연의 거대함 속에 만들어낸 화려함을 마치 자신은 자연 속에서 소박함을 추구하고 있노라고 믿고 있던 스스로의 허상이 깨지는 깨달음 같은 것이랄까요?)


<글라스 하우스>  by 필립 존스



여러분은 음악을 듣고 나서 어떤 느낌이 생기시나요?


페트렌코의 이번 연주는 이 지휘자도 제가 코스모폴리탄적인 지휘자라고 생각하는 범주에 속하고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아주 세련된, 카라얀이 만들어 낸 베를린 필 (푸르트뱅글러 시대와 다른)은 카라얀의 사후 아바도, 사이먼 래틀 그리고 이번 페트렌코 까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련되고 정제된 (그래서 뛰어나지만 개성은 조금 적어 보이는) 사운드에

부합되는 지휘자들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최고의 반열에 오른 대부분 교향악단들이 따라가게 만드는 어떤 의미에서 시장의 기대에 부합하는 옳은 선택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왜 음악시장은 이런 이성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선택에도 불구하고

이전 시대에 비해 자꾸 작아지고 있을까 하는 의심이 생기네요 ㅠㅠ)


우리가 음악을 듣거나 미술을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직업적으로 이 예술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무언가를 해야하는 이야기 꾼일 경우 (예를 들면 기자나 어설픈 비평가 또는 블로거 등의 - 제대로 된 기자나 비평가를 제외한)

위에서 언급한 6번 교향곡에 관한 이슈들이 음악보다 훨씬 중요하게 다가오겠지만 예술로 박사학위를 받을 것도 아니고, 밥벌이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닌 그저 순수한 애호가라면 주변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는 시간에  차라리 음악을 한번 더 들어보고, 미술관을 한번 더 찾아보는 것이 각자의 삶을 훨씬 더 가치 있고 충만하게 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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