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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Jun 13. 2020

새로운 세상의 시작 <트리스탄과 이졸데>

1865년 6월 10일 뮌헨, 그때까지의 예술 세계가 한 번에 뒤집혀버릴 만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그너의 위대한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이죠.


20세기 초 중반을 선도하던 무조음악의 서막을 알리는 '트리스탄 코드'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접목한 스토리까지, 당시의 사상적 예술적 흐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입니다.


바그너는 이 오페라에서 주인공의 캐릭터 설정도 이전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이 상징하고 있던 기독교적인 희생, 헌신, 사랑, 순결과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절정, 환희, 극락, 쾌락, 운명과 같은 색다른 개념들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첫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지고 그리고 이후로 행복하게 살아야만 하는 수많은 로맨스의 주인공들과 달리 이졸데와 트리스탄은 원수로 만나 그 적대감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같은 배에 타고 항해에 오르게 되는데,

둘 사이의 상황은 점차 악화되고,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졌다고 생각한 이졸데가 자신의 시녀에게 독약을 준비하라고 이르는 순간, 사랑의 새로운 모습을 개척하기 위한 긴 여정을 걷기 시작하게 됩니다.


차마 독약을 꺼내서 이졸데를 죽게 할 수 없었던 시녀 브랑게네는 사랑 없이 결혼해야 하는 이졸데와 마르케 왕을 위해 준비되었던 '사랑의 묘약'을 잔에 담고, 죽기 위해 독약이라고 생각하며 그 잔을 나눠 마신 두 남녀는 마침내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과연 사랑의 묘약이 있어? 그걸 먹으면 정말 사랑에 빠져? 근데 어떻게 저러다가 사랑의 묘약을 먹지?

와 같은 현대적인 서사구조의 합리성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바그너가 이런 이야기를 선택한 것은 그 스스로가 이 서사구조가 갖는 합리성의 모순에 대해 아무런 고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이 오페라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바로 사랑이 시작된 이후에, 궁극적인 사랑의 완성이 되는 장면이기에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통해 운명에 갇혀 버린 남녀를 등장시키고 그들의 궁극의 사랑을 죽음을 통해 완성시키는 색다른 진행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뭐 이전에도 이런 비극적인 스타일의 사랑의 완성이 있었죠.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유사하게 보이는 결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사랑하는 남녀의 죽음 앞에 모두 모여 오열을 하며 그들의 못다 핀 사랑에 애도를 보내고 있지만,

이 황당무계한 바그너의 음악극에서는 죽음이 완벽한 사랑을 위한 탈출구로 사용되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의 주검 앞에서 이졸데는 마침내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을 노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상하게도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런 부분을 생각할 때마다 저에게 떠오르는 영화가 한편 있습니다.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의 1990년 작  <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Le Mari de la coiffeuse>입니다.

(한국에서는 1992년 개봉되었는데요)



헤어드레서의 남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는 어린 소년 앙트완은 어느 날 저녁 식탁에서 아버지에게 자신의 장래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당당히 미용사의 남편이 되겠노라고 대답합니다. (당연히 상상하시는 것처럼 난리가 나죠.. 어째건...)  그리고 40년이 지난 어느 날 마치 만화의 한 장면처럼 우연하게 자신의 꿈을 이룰 기회를 잡게 되고, 그렇게 그는 마틸드와 결혼해서 사랑이 충만한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마틸드는 너무나 사랑하기에 불행이 오기 전에 ( 혹은 이 사랑이 그 정점에 달해 충분함이 가득한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당신을 떠난다는 메모를 남기고 사라져 버립니다.


이 생에서의 행복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요?

당시 영화를 본 많은 관객을 당황하게 했던, "완벽한 사랑의 절정은 죽음을 통해 그 절정의 순간에서 더 이상 무너질 수 없게 되며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라는 영화의 메시지는 3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거의 155년 전 완성된 이 죽음을 통해 비로소 완벽해지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3막 사랑의 순간이 당시의 문화 예술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지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당시의 보편적인 관념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부분들을 창조해 내기 위해, 바그너는 사랑하지도 않던 두 남녀에게 '사랑의 묘약'을 던져 주고 빠져나갈 공간을 완전히 없애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이 남녀에게는 어찌하던 궁극의 사랑을 완성해야 하는(세상의 끝에 도달해야 하는) 단 하나의 해결책만 남게 돼버리게 됩니다.


3막 이졸데의 아리아 <Mild und Leise>의 첫 부분 가사입니다.


Mild und leise wie er lächelt,     /      Mildly and gently, how he smiles,


wie das Auge, hold er öffnet      /       how the eye  he opens sweetly


Seht ihr's, Freunde?                    /        Do you see it, friends?


https://www.youtube.com/watch?v=TyoRIYHxgP4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앞에 두고 있는 절규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느껴지시나요?

아마도 그런 느낌을 받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졸데에게 남겨진 상황을 통해 우리가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일반적인 감정과 전혀 다른,

아주 극적이며 중독성 넘치는 이 음악에서 우리는 관능미, 절정, 쾌락, 그리고 환희를 느끼게 됩니다.



장 피에르 폰넬의 연출과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로 연주된 1983년 바이로이트 실황입니다.

1시간 24분경부터 시작되는 2막의 시작 부분 30분 정도를 보시면, 바그너의 이 거대하고 거친 음악 속에서 여자 주인공의 연기와 노래를 통해 바그너가 표현하고자 하는 사랑에 대해 조금씩 느낄 수 있는데요, 이 부분에서 불붙기 시작한 두 남녀의 사랑이 3막의 죽음 앞에서도 꺼지지 않고 이어지며, 어떻게 환희를 노래하고 있나를 비교해 보시면 극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djFBW-S3z0





물론 바그너가 지향했던 것이 극과 음악의 완벽한 합치이기에, 단지 스토리를 중심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이 오페라를 이해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바그너는 그가 만들어 내고자 하는 이런 새로운 관점을 음악적으로 완성시키기 위해 음악적 형식에서도 이전과 다른 새로운 양상으로 끌고 나가게 됩니다.


1막 간주곡의 시작부분 화음 (일명 트리스탄 코드)부터 기존의 화성법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음들의 화합을 만들어 내면서 '무한 선율'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음악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는 등 그가 가진 예술적 창의성을 모두 쏟아붓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런 새로운 철학적 심리학적 현상은 단지 언어(오페라의 대본인 리브레토)만을 통해서는 완벽하게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이 음악을 통해서 즉 바그너가 일컬은 음악극을 통해 그 순간의 감정과 느낌이 더 확실하게 오감을 통해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는 점이 바로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한 창조성 일 것입니다.    




음악사에 이슈를 만든 작품 치고는 레코딩이 많지는 않습니다.


문학에서 많은 이들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프루스트를 이야기 하지만 막상 그들의 책을 실제로 읽는 독자가 많지 않은 것처럼, 바그너의 이 위대한 음악극(오페라)도 상업적으로는 일부 극성팬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다행히 레코딩이 많지는 않지만 대부분 아주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월터 레게가 제작한 푸르트벵글러의 기념비적인 1953년 EMI 판과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1982년 DG 판은 스튜디오 레코딩이외에도 의외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공기처럼 가볍고 매끄러운 속도감입니다. 유연한 리듬의 선택을 통해 몰아치는 듯한 긴장감을 조성하며, 동시에 세부 요소들이 가지고 있는 박커스적인 탐닉을 아주 잘 포착해 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가장 바그너의 의도와 가깝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단지 클라이버는 속도에 제한이 없이 한 없이 가벼워져 날아오르려는 욕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가 선택한 이졸데인 마가렛 프라이스는 다른 음반들의 주인공에 비해 유독 가볍고 예쁜 소리를 들려주고 있는데, 점점 뜨거워지며 가벼워지는 열기에 마치 모래주머니도 없이 끝없이 올라가려는 비행선처럼 위험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발생합니다.  이졸데의 관능은 예쁘고 상큼한  10대 소녀 같은 느낌은 절대 아니니까요.


푸르트벵글러 판에서 이졸데를 맡고 있는 플라그슈타트는 명성 그대로, 여유 있는 호흡과 발성 (녹음 당시 그녀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거의 경이적인)을 통해 가장 아름답고(바그너적인 관점에서) 극적인 이졸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녀와 파트너를 이루는 주트하우스는 독일 바그너 테너임에도 상당히 부드럽고 낭랑한 음성으로 플라그슈타트와 잘 어울리는 모습을 이뤄 냅니다.


이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신이 아닙니다.  더 이상 그리스의 비극처럼 신이 아닌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죽음은 하늘 위의 세계가 만들어 내는 신화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모성인 땅 위의 죽음일 뿐인지라, 서서히 가벼워지며, 한 줌의 재로 바뀌고, 그리고 마침내 대지의 품으로 돌아와서 그들의 기억 속에서만 하나가 되는 박커스의 노래가 되어야 할 텐데,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는 박커스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 박커스는 어둠의 숲을 헤치고 나온 지혜가 더해진 박커스입니다. 푸르트벵글러의 손끝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에서는 어둠을 헤치고 거대한 바다에 도착한 새로운 바람이 느껴집니다. 시원한 바다의 향내가 풍기고 있습니다. 벌판을 채우던 건조하고 가벼운 바람과는 그 규모가 다른 거대한 습기를 머금은 무게감 있는 푸르트벵글러가 만들어 내는 바람은. 클라이버의 한 없는 가벼움과 달리 거대한 흐름을 지닌 하나의 기류로 변해 나가고 있습니다.



바렌보임은 80년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 가까운 기간 동안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주요 공연의 지휘를 책임졌던 가장 중심을 이루는 지휘자였습니다. 

그로부터 약 10여 년이 흐른 뒤, 바렌보임은 베를린 필과 함께 새로운 스튜디오 녹음을 시도합니다.



83년의 실황 영상에서는 Johanna Meier와 Rene Kollo 가 각각 타이틀롤을 맡고 있는데 94년 녹음에는 Waltraud Meier와 Siegfried Jerusalem이 부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졸데를 메조소프라노가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황을 통해 이졸데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한 바렌보임의 선택이기도 하고, 발트라우트 마이어가 워낙에 뛰어난 가수이기에 발매 당시에 불거졌던 이슈들은 곧 사그라 들었는데, 메조소프라노가 과연 가능할까 하고 의문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위에 또 다른 링크로 감상하신 "Mild und Leise"에서 이상한 부분이 있었는지 확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바로 메조소프라노 발트라우트 마이어가 부르는 이졸데의 마지막 아리아였으니까요..


트리스탄은 지크프리트는 아닌 지라, 개인적으로는 주트하우스나 르네 콜로 같이 좀 더 부드럽고 낭랑한 목소리의 테너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런 목소리의 바그너 테너를 구하기는 불가능에 가깝고 점차 지크프리트 예루살렘 스타일의 테너들이 주류로 자리 잡게 되는데요 ( 이전에도 이런 무거운 스타일의 바그너 테너가 더 많았습니다. 전설 속의 멜히요르 처럼요) 이 스타일의 테너들은 발성 방법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인지 목소리가 탁한 편이라 사랑을 속삭여야(??) 하는 트리스탄 역을 부를 때는 많이 답답한 느낌입니다.


이 바렌보임의 지휘는 세련되고 균형감이 잘 잡혀 있으며 매우 현대적인 느낌을 줍니다. 메조를 이졸데로 기용한다든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관현악 총주시에 다양한 악기들이 내는 상대적으로 작은 소리가 묻히지 않게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 등이 아주 현대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위의 동영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2막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조우하는 장면 "Isolde! Geliebte"의 바로 전 이졸데의 기대에 찬 몸짓을 표현하는 생기 있는 부분 등은 아주 작은 음표까지 정확하고 세밀하게 표현해 내는 바렌보임의 장점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늘 그의 지휘에서 느끼는 아쉬움은 절정의 순간에 필요한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마치 거의 마무리에 도달할 때까지 잘 기다리다가 그 뜸이 들기 바로 전에 뚜껑을 열어버린 압력솥 안의 설익은 밥처럼 푸슈~하고 김이 새 버리는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2막 첫 부분 이졸데와 브랑게네가 2 중창을 부르는 과정에서 이졸데의 감정이 달아오르는 부분이나, 3막의 마지막 이졸데의 아리아 등에서 에너지가 끝까지 뻗어 올라갈 만큼 오케스트라의 밀도가 충분히 쌓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바그너와 브르크너가 녹음 당시에 많은 음반 평론가의 지지를 받고 있건만, 세대가 지나가 버리면 자꾸 묻혀버리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건 현대적인 관점에서 가장 모범적인 연주 중에 하나이며, 전체적으로 완벽한 구조에 가깝게 그리고 순간의 감정이 전체를 망치는 경우가 생겨나지 않도록 지속적인 절제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좋아하는 팬이시라면 왜 이 사람이 이 녹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할까 하고 답답해하셨을 텐데요, 그렇죠 바로 칼뵘의 66년 바이로이트 실황 녹음은 푸르트벵글러의 음반과 함께 가장 다수의 음반 평론가들이 최고의 연주로 꼽고 있는 녹음입니다.


 


아마도 전체 성악진의 구성은 역대 가장 베스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비르기트 닐손의 목소리에는 플라그슈타트 만큼의 감성이 표현되지는 않지만, 전성기의 그녀와 빈트가센 듀엣이라면 역대 어떤 조합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습니다. 빈트가센은 르네 콜로가 가지고 있는 부드러움과 그 외의 바그네리언 테너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다 뿝어져 나오고 있고, 너무나 교과서적인 디스카우의 쿠베르날에 비해 베히터의 모습이 좀 더 호감이 가기도 합니다. 루드비히의 브랑게네는 푸르트벵글러의 연주에서나 여기에서나 양쪽 모두 뛰어난 안정감을 보여 줍니다. 최근의 레코딩에 등장하는 여러 브랑게네들이 호흡 부족으로 딕션의 기본이 안 지켜지고 독일어의 격음들이 너무나 거슬리게 들리는 것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레벨의 품격을 보여줍니다.

뵘의 지휘는 다이내믹과 균형감 (늘 그렇듯 균형과 조화는 뵘의 가장 큰 장점인데)의 조화를 통해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고, 그 위에 하나하나 음표로 싸인 구조물을 지어 올리며, 거대한 음악 드라마를 만들어 나갑니다.

바그너의 긴 프레이즈를 가수들이 한 호흡에 부를 수 있도록 매우 적절한 템포를 선택하는 것 역시 뵘의 바그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주 독특한 면모입니다. 그렇기에 가수들의 호흡 때문에 듣는 청자의 호흡까지 거칠어지는 일부 연주의 상황이 여기서는 벌어지지 않고 있으며, 라이브 공연임을 생각하면 3막 전체에 걸친 조화가 만들어내는 높은  완성도가 경이롭게 느껴질 따름입니다.




90년대 중반까지 바렌보임이 바이로이트를 이끌고 나갔다면 2000년도 중반 이후로는 틸레만이 그 역할을 이어가는 듯이 보이는 데요, 재미있게도 그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음반은 빈 국립 오페라에서 펼쳐진 2004년 실황 연주를 녹음한 것입니다. ( 최근에 바이로이트 실황 동영상도 발매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저는 아직 접하지 못했습니다)



빈 국립 오페라에 바그너의 작품이 연주되면 빈 뿐만 아니라 꽤 먼 독일에서까지 휴가를 내서 오페라를 보러 오는 극성팬들이 많기 때문에 원래도 세계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이지만 바그너에 관해서도 바이로이트에 밀리지 않는 연주 품질을 보장하는 곳입니다.


일단 그런 빈에서 최근의 바그너 여가수 상황을 볼 때 가장 믿음직스러운 바그너 및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전문 가수 중 한명인 Deborah Voigt가 이졸데 역을 맡고 있습니다.


틸레만의 지휘 스타일은 일반적으로 곡 전체의 감정 흐름을 유연하게 끌고 가려는 편인데, 이상하게 이 실황 음반에서는 세부 디테일에 너무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가 가진 장점인 음악을 자연스럽게 끌어올려 클라이맥스로 다가가는 느낌이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템포가 부자연스러워지며 생동감이 사라지고, 전체의 흐름과 세부의 리듬이 부분적으로 매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비브라토로 연주하며 프레이즈가 연결되어야 하는 부분 등에서 현이 탄성을 잃는 모습 등이 나오는데, 1막의 간주곡 시작 부분과 2막의 첫 이중창 이후 주인공들이 상봉하는 장면 등 에서 두드러집니다. 마치 지휘자 자신의 감정에 북받쳐 템포가 느러지며, 현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것 아닌 가 하는 느낌이 드는데요, 틸레만 지휘의 바그너를 들을 때마다 드는 느낌은 틸레만이  파르지팔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니체의 표현에 의하면 김나지움을 졸업한 순진한 모범생이란 것인데, 틸레만은 가끔 어디서 끊어내고 어디서 날아올라야 하는지를 잊어버리는 그저 순진하게 자신의 격한 감정에 휩싸여서 오케스트라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번스타인의 종잡을 수 없는 템포로 유명한 녹음도 있습니다.


번스타인의 말러와 이 <트리스탄과 이졸데> 연주는 듣는 청자와 번스타인 간에 서로의 감성이 합이 맞을 경우 참 좋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의 변덕스러운 즉흥적 템포 변화에 인내심을 시험받게 됩니다.

제 지인 중에 한 명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이 연주를 꼽고 있는데 저에게는 전체적으로 가장 견디기 힘든 연주입니다. 

동일 프레이즈 내에서도 템포의 변화를  너무 많이 주고 (이 마저도 부분 부분 늘어지는 스타일이라) 가수들의 호흡에 크게 신경을 안 쓰고 있어서 전체적인 연주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편입니다.

부분적으로 2막의 시작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듀엣까지의 진행은 상당히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치는 만족스러운 연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졸데를 부르고 있는 힐데가르드 베렌스가 서정적인 음성과 풍부한 음량을 바탕으로 다채로운 분위기를 노래하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입니다. 


트리스탄 역을 맡은 피터 호프만은 바그너 가수이기도 하지만 이후 클래식 락을 부르는 대중가수로 변신을 해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바그너를 부를 때는 정제되지 않은 느낌의 갈라지는 거친 목소리가 <All by myself>를 부를 때는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네요. 바그너 테너의 부족으로 나름 한 시대를 대표하는 바그너 가수였지만, 본인이 잘하는 노래와 좋아하는 음악은 따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0UzhADL7Js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녹음은 플라시도 도밍고가 트리스탄 역을 불러서 이슈가 되었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 버전입니다. ROH의 음악감독인 파파노가 지휘를 맡았고, Nina Stemme가 이졸데 역을 맡고 있습니다.



도밍고의 도전정신 하나는 인정해야 할 듯합니다. 로엔그린의 백조의 기사에 이어서 트리스탄까지 바그너에 도전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로시니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피가로를 녹음하는 그의 끝없던 레퍼토리에 대한 욕심은 정말 대단하죠.


사실 도밍고가 실제 무대에서 이 역을 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스튜디오 레코딩이다 보니, 이런 색다른 기획이 가능할 듯합니다. 전체적으로 출연 가수들이 바그너의 엄청난 오케스트라의 볼륨을 이겨낼 성량이 안되기에 지휘자는 아주 색다른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R.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같은 상쾌함이 느껴지는 색다른 결의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요,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한 후, 그 패러다임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곡 해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의 세계에서 존재하기 힘든 상상의 무대 같은 느낌이라, 어쩌면 바그너가 보여주려고 한, 하나의 특이점을 지난 이후의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해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주 정교하고 뛰어난 앙상블을 바탕으로 상쾌한 리듬의 오케스트라가 진행되는 동안 가수들 역시 상대적으로 멜랑콜리한 감성이 풍부하게 드러나는 노래를 선보여주고 있습니다.

기획 의도 자체가 스타 마케팅이다 보니, 1막의 선원 역에 Rolando Villazon이 등장하고 3막의 양치기에 Ian Bostridge가 등장하는데, 전체적인 구성과 기획이 카라얀이 전성기에 빈에서 호세 카레라스와 카티아 리차렐리를 캐스팅해서 아주 낭만적인 투란도트를 선보였던 것과 왠지 결이 비슷해 보입니다.

(카라얀은 꿋꿋하게 테너만 도밍고로 바꾼 후 레코딩도 했죠)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크게 관심은 없지만 중요한 작품이니 한 번쯤 전곡에 도전하고 싶다고 생각하신다면 오히려 이 도밍고의 음반이 가장 편하게 전곡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60줄에 접어든 도밍고의 목소리는 (더군다나 바그너를 부르고 있기에) 부드럽고 깊은 맛을 내던 고급 까망베르 치즈 같던 목소리에서 오렌지 주스를 사각사각 얼린 그저 그런 맛의 셔벗 느낌으로 변해버렸고,

베르디나 풋치니를 부를 때면 황금빛 물감이 가득했던 그의 팔레트가 여기서는 푸르고 여린 약간은 물 바랜 쪽빛 물감으로 바뀌어 있는 느낌입니다.


바그너의 오케스트레이션이 담고 있는 개별 악기들이 각자의 개성을 표출하는 과정이 다층적으로 접합되어 짙은 감정의 밀도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산뜻하게 다이어트된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사운드는 어떤 면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전체적인 가수들의 성량 등과의 밸런스를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여겨집니다.


다양한 녹음들을 둘러보았는데, 바그너가 궁극적으로 바라보던, 현생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점의 절정과 환희 그리고 그것을 통한 쾌락과 극락의 중독성을 가장 잘 표현한 푸르트벵글러의 녹음이 부족한 사운드 질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저에겐 최고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남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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