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 포폴 진짜 사용자 Persona
6:00. 시끄러운 기상벨.
으레 직장인들이 그렇듯 10분 간격으로 맞춰 놓은 여러 개의 알림을 해제하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이 든다. 월요일이라 그런가 따듯한 샤워기 물에 몸을 밀어 넣고 보니 지금이 일요일 새벽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한번 일요일 새벽에 월요일인 줄 알고 출근 준비를 서둘렀던 착각을 했던 적이 있었던 탓인지, 지금이 그 순간이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다시 맴돈다.
6:15 머리를 말리는 드라이기 소리.
다음에는 좀 더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하나 잠시간의 고민. 대학시절엔 밤샘 작업이 많았던 나머지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반삭발을 해던 적도 있었는데, 미대생이라는 자격 때문인지 그런 튀는 차림새 정도는 가볍게 개성으로 넘겨주던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직장인인 지금은 괜히 눈에 띄는 상황은 피하고 싶다.
6:25 지하철 개찰구 카드 찍는 소리.
조금 이른 듯도 하지만 김포에서 회사가 있는 선릉까지 도착하려면 이 시간에 나가지 않으면 대책이 없다. 한 번은 회사에서 주차 지원을 해 준다기에 차를 끌고도 가봤지만 다시는 출퇴근 시간에 강남 인근에서 운전을 하지 않겠노라는 다짐과 그날 하루 유달리 더 피곤했던 컨디션 말고는 기억이 없다.
적어도 지하철은 거의 1시간 반 정도 걸리긴 하지만 운이 좋아 자리에 앉는 날은 잠을 자거나 그렇지 못한 날은 뒤쳐질까 두려워 의식적으로 꺼내드는 책을 읽을 시간이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난주 오랜만에 만난 대학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자영업을 시작한 친구가 내 출퇴근 시간을 듣더니 가까운 데로 이사를 가는 게 낫지 않냐고 가볍게 던진 질문이 생각난다. 사실 나도 그러고 싶다. 직주근접이 되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지금까지 모아 온 티끌 같은 재산과 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을 보태도 강남 쪽에는 변변찮은 전셋집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더욱이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아이를 생각하면 교육 환경도 보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지금 30평형대 후반 아파트에 신도시라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많아 유흥 시설도 적고 아이를 안심하고 보낼만한 학원이나 교육시설이 많은 동네를 고르라면 지금 사는 곳 만한 곳이 많지는 않다. 나 혼자 산다면 기꺼이 회사 근처에 좁은 방이라도 얻어 보겠지만 가족이 딸린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 차라리 내가 출퇴근길 조금 고생하더라도 수도권 외곽에 집을 구하는 게 여러모로 현실적이다.
6:50 지하철 환승역 플랫폼 소리.
잠이 확 깬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걸음을 멈출 수도 없어서 9호선 환승을 하려 걷고 있노라니 앞에서 걷는 사람이 자꾸 신경에 거슬린다. 핸드폰을 보며 걷는 건지 걷는 속도감이 이상한 데다 지그재그로 걷는 통에 자꾸 내가 걷는 경로에 부딪혀 신경 써서 피해야 한다. 아직 잠도 덜 깼는데 살짝 올라오는 짜증.
7:25 내 어깨에 자꾸 기대어 오는 옆자리 승객.
오늘은 운이 좋게도 환승역 가장 앞에 줄 서있다가 바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모자란 잠을 보충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거 같은데, 누군가 자꾸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살짝 꿈까지 꿀 뻔했는데 불쾌감이 치솟아 눈을 뜨니 어느새 내릴 역이 가까웠다. 되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릴 역을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애써 위안 삼으며 주섬주섬 일어난다.
7:50 카페테리아 원두 가는 소리.
회사 건물에 들어와 1층에 있는 카페에서 따스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잠시 멍 때리는 시간. 아무것도 모르던 대학생 시절, 회사원이 되면 아침 채광이 가득한 사무실 책상에 경제지를 던져놓으며 커피를 입에 머금는 모습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허황된 꿈을 꾸어보기도 했다. 지금은 그저 모퉁이가 해진 사원증을 만지작 거리며 얼른 저 커피를 때려 넣어야 잠이 깰 텐데 하는 생각 반, 피곤함 반뿐이다.
8:00 사무실 보안카드 찍는 소리.
유연 근무자도 있긴 하지만 기본 출근 시간이 9:00이기에 아직 사무실엔 사람이 거의 없다. 사무실 구석에 있는 본부장실 바로 앞에 있는 내 자리로 향하는 동안 방에서 나오는 칫솔을 입에 문 본부장님과 마주친다.
“안녕하십니까”
“어, 김 부장 일찍 왔네? 8:30에 회의인 거 알지?”
가벼운 인사를 뒤로 한채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킨다. 저 양반은 집이 없나, 잠이 없나. 예전에 서비스 출시건 때문에 5:00에 출근했을 때 기억으로는 정확히 6:30에 사무실에 출근하는 걸 본 기억이 있다. 아무리 임원은 계약직으로 근태관리 규정이 다르다곤 하지만 이 정도면 늙어서 잠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저 정도는 해야 임원을 하는 건지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거기에 본부장 본인 오전 일정을 위해 사전에 한 주간 산하 부서들 이슈들 파악하고 하려면 늘 월요일은 이 시간에 회의를 하게 되니 더 죽을 맛이다.
컴퓨터를 켜고 메일함을 열어보고 잠시 헛웃음을 흘린다. 안 읽은 메일 137개.
루틴 한 지표보고 자료부터 자잘한 이슈 메일들, 그리고 이번 주는 지난주부터 올려둔 채용공고 탓에 인사부에서 날아온 이메일이 한가득이다. 하반기 전략 대응건으로 인력이 필요해서 대리-과장급 인력을 2명 요청한 게 4개월째인데 지난주에서야 간신히 대리-과장급 1명, 신입 1명을 승인받았다. 당장 굴려먹을 경력직 2명을 달랬더니 요즘 AI다 뭐다 업무재편 하면서 인력 감축 기조라 특별히 2명을 허가받은 거란다. 이력서에 뭐가 잔뜩 온 거 같은데 일단 덮어두고 회의 참석. 다른 부장들도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다.
09:30 조금은 부산스러움이 생긴 사무실.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 앉으니 어느새인가 출근한 직원들이 간단히 인사나 목례를 건네온다.
월요일부터 안 좋은 소리 하긴 그렇지만 팀장들만 회의실로 잠시 소집했다. 아침 본부장 회의 때 이전 프로젝트에서 자잘한 문제가 몇 개 터졌는데 지원부의 최부장 놈이 그걸 굳이 공론화시키고 난리를 피운다. 자초지종을 따져봐도 우리 부서의 과실은 없는 건이라서 그나마 괜찮았는데, 개발부 박 부장은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게 보인다. 승진을 노리는 최부장 놈의 가득한 야망 탓인지 별거 아닌 일을 자꾸 키우려 떠들어 대는 통에 본부장님도 심기가 불편하다. 이럴 때 불똥이 튀지 않으려면 사전에 관리를 잘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우리가 진실의 방이라 부르는 가장 작은 회의실에, 나, UX설계팀장, 디자인팀장, 데이터분석팀장 넷이 앉는다. 평소 분위기 메이커인 데이터팀장이 가벼운 농담을 건넨다. 얼른 본론만 말하고 나도 내 할 일을 하고 싶지만 이런 거 잘 안 받아주면 또 누구는 편애하고 누구는 상대도 안 해주고 뒷말이 나올까 두렵다. 적당히 인사치레로 농담을 주고받은 뒤 오전 회의 이슈를 간단히 전달하고, 우리 쪽 현황이나 신규 이슈들 가볍게 팀별로 정리해서 오전 중에 내 책상에 올려놓으라고 지시하곤 15분 만에 미팅을 마쳤다.
10:20 회사 옆건물 카페에 앉아 내쉬는 푸념
이게 그저 내가 여유피며 꺼내놓은 푸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팀장 미팅을 하고 나니 UX팀장이 보고 이슈가 있다며 잠시 따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슈가 다소 민감해서 조용한 데서 따로 이야기했으면 하잔다. 평소 일도 잘하고 싹싹한 친구가 다소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니 거절할 수가 없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최근에 공채 인력 중에 우리 부서에 배치된 신입사원, 양사원이 문제란다. 고집이 약간 있는 걸 알긴 했는데 그게 자꾸 사수인 심대리랑 부딪힌단다. 아니 내가 필요해서 뽑아달라는 사람은 제때 뽑아주지도 않으면서 억지로 밀어 넣은 공채 신입사원은 뭐 몇 달이나 됐다고 팀장이 잔뜩 무게를 잡고 이야기를 하나 싶을 정도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심대리가 지시한 리서치 건에 대해 신입사원이 종종 반발이 있는 모양이다. 입사 지원서에 해커톤 참여부터 인턴십까지 3~4군데 이상은 경험했고, 자격증도 꽤 많았던 열심히 준비한 친구로 기억하는데 그런 경험이 이번엔 문제였다. 심대리가 이야기하는 방향이 자기 생각에 안 맞으면 자기가 했던 스터디에선 이런 게 어떻고 사족이 자꾸 달린단다.
팀장도 나름 주의를 줘보려고 이야기하는 주장의 근거를 대거나 필요하다면 시간 따로 빼 줄 테니 보고서를 작성해서 그거 가지고 같이 이야기해보자고 해도, 문서작업이 귀찮은 건지 자꾸만 그 스터디에는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고, 이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고 스터디가 얼마나 권위 있는 모임인지를 어필하려고 한단다. 몇 번 주의도 줘보고 술자리에 따로 불러 인간적으로도 이야기해보려 노력했지만 이제는 심대리가 스트레스받아서 도저히 같이 일하기가 힘들다는 상황. 지난주에 일이 크게 있었던 모양인지 심대리는 오늘 연차다.
아침에 바삐 면도를 하나 놓친 수염이 몇 가닥 있었는지 팀장의 말을 들으면서 턱을 문지르고 있다 보면 가끔씩 얽혀오는 까칠한 느낌이 굉장히 거슬린다. 커피를 홀짝거리는 사이 더 말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대충 알겠다.
아무래도 요즘 가혹행위나 괴롭힘 같은 이슈가 몇 건 터졌더라서 그런지 노조도 그렇고 상당히 민감한 분위기다. 그래서 팀장이 더 이상 세게 말하기도 부담스러운 상황이겠지.
“오후에 관련 프로젝트 경과 보고 받을 테니까 준비하라고 시켜"
수년간 나랑 손발을 맞춰온 사이기에 금세 내 의도를 알아챈다. 당사자를 직접 혼내기 힘든 상황이면, 어떤 상황인지 알게끔 약간의 역할극을 하겠단 소리다.
11:10 책상 위의 커피 두 잔.
자리에 다시 앉으니 아침에 사 온 커피와 방금 들고 올라온 커피 두 잔이 책상 위에 놓였다. 이미 아침에 사 온 커피는 온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식어버린 뒤다. 이젠 내 원래 업무를 챙겨야 할 시간.
상반기도 지났으니 성과보고를 해야 하니 부서 KPI 성과기술서를 써야 한다. 전략 놈들이 하도 보채대서 유예기간도 얼마 없다. 그리고 선임 부서라서 본부 KPI도 취합 보고해야 하니 골치 아프다. 이 차장이 기본적인 초안을 작성해서 가져오긴 했는데 영 맘에 들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상반기 매출성과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지표가 좋지 않다. 이 와중에도 상대적으로 좋은 성과를 얻으려면 없는 수치도 찾아가며 쥐어 짜내서 뭔가를 만들어야만 한다.
상반기 성과가 그저 안 좋았어요로 끝나면, 아마 부서 인사평가도 끝나버리겠지. 부 인사평가가 깎이면 부서원들 인사평가도 상대적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다. 한 명이라도 더 좋은 점수받게 하려면 최선의 글짓기를 해야만 한다. 부족한 건 실토하더라도 부분적으로 호실적이 보였던 부분은 따로 떼어내서 해석하고, 부족한 부분은 하반기 보완 대책이나 개괄적인 시행 전략을 두루뭉술하게 짜서 메모한다.
그 사이 본부장실 문이 열리고 본부장님의 샤우팅 공지가 이어진다.
"김 부장! 오늘 점심 약속 있어? 어디 어디 업체에서 오는데 그거 알고 있지?”
분명 비서를 통해서 이야기해 줘도 될 내용인데 직접 문을 열고 이야기한다는 건 필시 그거다. ‘빠지지 마라 필참 해야 한다?’. 애써 웃는 얼굴로 긍정을 하곤 정리한 문서를 이 차장을 불러 설명해 준다. 일머리가 있고 눈치가 빠른 친구라 그런지 금세 알아듣는다. 제출기한이 임박하니 전략부에는 내 이름을 팔아도 되냐고 묻는다. 기한 연장할 때 내 핑계를 대겠단 소리.
가볍게 끄덕이고는 본부장님 비서를 불러 식사 미팅에 오는 업체 정보나 개략적인 방문자의 직함 등을 모아 본다. 그래도 식사 자리에서 예의라도 차리려면 뭐라도 알고 가야 하기에 서둘리 뉴스에 업체 이름을 검색해서 해당 업체에 대해 가볍게 분석을 해본다. 그리고 협업을 할만한 건더기나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전략과 맞물릴 뭔가가 있는지도 살펴보면서 가볍게 정리하고 있노라니 시간이 됐단다.
11:45 회사 근처 중국집 룸.
중식을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는데, 적당히 룸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조용하기도 하고, 요리도 제법 잘하는 집이라 적당한 인사치레엔 부족함이 없어서 종종 찾는다.
서로 명함을 건네고 의례적인 인사와 이어지는 멘트들. 나도 앞서 살펴본 뉴스에 있던 굵직한 이슈들을 가볍게 던지면서 호의적인 관심을 표한다. 어느 정도 식사가 마무리되면 본부장실로 올라와 가벼운 다과로 본론을 이어간다.
14:00 엘리베이터 닫히는 소리.
업체 사람들을 배웅하고 나서 본부장님과 둘이 본부장님 실로 들어간다. 미팅에 대한 솔직한 내 의견과 본부장이 바라보는 전략적 방향성을 어느 정도 맞추고 내가 기대하는 것과 우려하는 것들을 솔직히 고한다. 참고하겠다는 본부장님의 말을 뒤로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오후 업무 시작
부서 프로젝트 추진 현황 체크하면서 가벼운 업무들을 하고 있노라니 UX팀장이 내 자리로 찾아왔다. 있다 3시 즈음 내 일정을 묻는다. 그 역할극을 할 시간으로 정한 모양이다. 그리곤 가볍게 내게 추가 노티를 해준다. 이번 추가채용 2명 1차 접수인원 서류 검토를 수요일까지 인사부서에 회신 줘야 한단다. 지원자 232명 중에 팀장이 일단 10명까진 추렸다고 하니 시간 될 때 봐달란다.
사실 오늘 역할극의 핵심 조연이 되는 신입사원은 내가 직접 면접을 보진 않았다. 공채 인력이라 그냥 팀장에게 맡겨둔 것도 있었는데 이번 추가 채용 인원은 정말 필요한 프로젝트 인원이라 나도 신경 써서 뽑을 작정이다. 이력서를 몇 개 살펴볼까 하다가 시계를 보니 3:00가 살짝 지났다. 나는 몸을 일으켜 지실의 방 옆에 있는 6인 회의실로 향한다.
15:03 긴장된 기침소리.
회의실에 들어가니 UX팀장, 같은 팀 박 과장, 문제의 신입사원 셋이 앉아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바로 진행 상황을 물어본다. 지금은 좀 분위기를 잡아야 할 상황이라 가벼운 농담 같은 건 모두 생략. 좀 전 부서 프로젝트 현황으로 확인한 바로도 예정보다 다소 늦어지고 있는 모양새다.
간단한 브리핑을 듣고 나서 문제가 뭐냐고 물은 내 질문에 먼저 박 과장이 열심히 대답한다. 내 업무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을 배려한 적절한 요약과 대표 이슈만을 정리한 논리적인 보고. 그래서 이 친구가 이쁘다. 사실 이 프로젝트에 몇 가지 방법론 중에 선택을 해야 하는 주요 이슈들이 있긴 한데 이쪽의 분석을 맡은 심대리/신입사원 파트 쪽이 부진해서 약간의 답보상태.
사실 이 둘이 지연된다고 해서 돌아가지 않는 프로젝트도 아니고 다들 실력도 괜찮아서 오랫동안 데리고 일하는 친구들이기에 여차하면 이 친구들이 금세 채워 넣어 어떻게든 돌릴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이 친구들을 믿는 만큼 이 친구들도 심대리를 잘 알기에 지금 이 신입사원을 한번 바로 잡아줘야겠다는 마음이 같은 모양이다.
내가 먼저 말문을 연다.
“그래서 이쪽 이슈는 왜 아직도 정리가 안 된 거야? 뭐 데이터가 부족한 거야 뭐야?”
“부장님 이게 방향이 다소 어긋난 거 같아서.. 아무리 생각해도 틀린 거 같아요.”
나는 더 말해 보라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제가 알기로는 이 시장에는 A라는 방법론이 지배적인데, 이걸 자꾸 B를 중심으로 찾아보니 뭔가 안 맞는 거 같아요.”
나는 책상을 손가락을 톡톡 두드린다. 역할극을 떠나 그냥 짜증이 났다.
“양사원 잘 들어요, 상사에게 보고할 때 그냥 자기 생각만 이야기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 적어도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가지고 내가 그걸 검토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해 주는 게 기본이 아닐까?”
사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바로 위 사수도 아니고 그래도 상대적으로 가까워 보이는 팀장도 아닌 부장에게 쓴소리를 면전에서 들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그 기분 나도 잘 안다. 나도 신입사원 때 그럴 때가 있었으니까, 상황은 물론 달랐지만.
“이게.. 우연찮게 제가 참여했던 스터디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지금 대기업 어디 계신 분이 하신 말씀인데 어느 업체에서는 이런 상황이고 …”
“팀장.”
“예, 부장님"
양사원의 이야기를 끊고 팀장을 응시한다. 여기부터가 역할극이다.
“너 애들 교육 안 시키냐, 내가 다른데도 이러니 우리도 이렇게 합시다 이 말 제일 싫어하는 거 알아 몰라?”
“예, 죄송합니다..”
“대기업 어디? 거기는 요즘 이슈 터져서 난리인데 우리도 똑같이 해서 다 같이 한번 징계받을까? 아니 애당초 걔네랑 우리랑 고객 스펙트럼이 같아?”
“아닙니다..”
“요즘 일이 편하냐? 이런 하나마나한 이야기 가지고 일정 딜레이 시키는 거 보면, 어떻게 나중에 가서 KPI 채울 자신감이 있는 거야? 아니면 그렇게 남들도 하니까 따라 하면 저절로 잘될 정도로 이 바닥이 쉬운 거야?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거냐?”
사원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발개진다. 그냥 자기가 반항하는 것 자체는 자신의 자신감이나 여러 오해로 얼마든지 모험해 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팀이라는 조직 전체가 비판을 받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물론 그걸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겠지만.
“이런 식으로 보고할 거면 그냥 하지 마, 바쁜 사람 붙잡고 혈압 올리는 소리 하려면 그냥 니들 마음대로 하고 각자 책임져. 알았어?”
15:30 깊은 한숨소리.
자리에 앉고 보니 짜증이 가라앉지 않는다. 요즘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지겨운 라떼 이야기 한다며 외면하기 일쑤지만 요즘이 너무 힘들게 느껴진다. 노동환경이나 조직문화 개선도 좋지만 진짜 혼내고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도 대신 허수아비를 때리면서 당사자가 직접적인 강압 행위로 느껴지지 않게 이런 촌극을 벌여야 하는 것 자체부터 피곤한 일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행위 자체도 사건의 당사자에게는 굉장히 스트레스가 될만한 일이지만, 이미 이 친구에게는 사수나 팀장이 수차례 방향을 알려주고 이끌려고 시도하다가 안 돼서 내게 올라온 게 아니었나? 만약 이걸로 문제 삼고 인사부에 달려가 뭔가 고자질할 녀석이라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고 회사생활이 어리광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깨닫게 해 줄 작정이다.
잠시 뒤, 채팅 알림 메시지 하나가 깜빡인다.
‘팀장: 부장님 죄송합니다, 잘 타이르고 가르쳐 보겠습니다.’
‘나: 어 넘 마음 쓰지 말고 하던 대로 잘해줘, 그리고 이번 채용은 좀 신경 써서 뽑자. 이런 애 한둘 더 있으면 진짜 정신 나가겠다’
‘팀장: 네, 이력서랑 포폴 추려서 보내드린 거 다시 한번 점검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나: 됐어 얼른 일하자.’
17:00 조용히 서류들이 스치는 소리.
다른 부서 협업 미팅과 자잘한 이슈들 몇 개 쳐내고 나니 벌써 이 시간이다. 금연한 지도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가서 흡연장에 왔다 갔다 하지도 않고 일만 하는데도 뭔가 한 것도 없이 하루가 다 간 기분이다.
어느덧 책상에 쌓인 커피컵도 5개, 마음 같아선 텀블러라도 써야 하나 고민도 해봤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썼다간 내 정신이 남아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에 과감히 포기했다.
살짝 고개를 들어 파티션 너머로 사건의 당사자를 살펴본다. 울기 직전의 표정이란 게 저런 걸까 싶은 표정.
가만히 팀장에게 채팅으로 따로 약속 없으면 오늘 쟤 밥이라도 사 먹이라고 상태 안 좋아 보인다고 넌지시 건네본다. 이번 달 팀 예산 전부 써서 이틀뒤에 예산 다시 들어오면 그때 사줄까 고민 중이었단다.
‘나: 이 새끼야 연봉도 높은 놈이 왜 이런 때 갑자기 구두쇠처럼 구냐, 내 법카 줄 테니 가져가.’
메신저로 한차례 구박을 쏟아낸 뒤에 멋쩍은 표정으로 가만히 카드를 받아 들고 가는 팀장의 뒷모습을 본다. 사실 저 마음 알 거 같다. 그냥 밥이고 뭐고 상대하기 싫은 기분이겠지. 지가 가르치고 타이를 땐 고집부리다가 부장인 내가 좀 불편하게 하니까 바로 표정부터 바뀌어서 뭔가 하려고 아등바등 대는 꼴을 보자니 무시당하는 거 같고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나도 사람이니까 안다. 하지만 하루이틀 만날 사람들도 아니고 같은 조직원이라면 하는데 까지는 해봐야 하니까.
17:40 약간은 들뜬 직원들의 농담소리.
퇴근이 임박하면 다들 기분이 조금씩 들뜨는 분위기다. 한쪽에선 퇴근하고 스크린 골프라도 치자는 작은 모임 결성의 이야기나, 전부터 사귀는 게 아닐까 의심했던 커플의 저녁약속 이야기 등등 다양한 잡설들이 오가기 시작한다. 그래도 프로젝트 마감 임박해선 자진해서 야근도 하고 그러는 친구들이라 딱히 미워 보이진 않는다.
나는 옆의 IT부서장이랑 잠시 회의가 있어 자리를 뜬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부장들끼리 회의도 종종 있기도 한데, 나는 그걸 가급적이면 특별한 이슈가 없는 이상은 퇴근 시간대에 잡곤 한다. 그래야 퇴근시간 땡! 하고 나면 칼퇴하고 도망칠 눈치라도 덜 보일 테니 말이다.
18:30 이제 이력서를 들쳐보는 시간.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니 이제 빈자리가 제법 눈에 띈다. 본부장님이 갑자기 저녁 미팅 생겼다고 가자고 하시면 영락없이 오늘 하루 마감은 술자리로 끝났겠지만 오늘은 다행히도 내 자리에 앉아서 잠시 여유 부릴 시간이 생겼다. 어차피 지금 나가봐야 퇴근길 지하철에 끼여서 고생하느니 조금 늦게 나가서 쾌적하게 가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팀장이 보내준 메일을 열어 포폴과 이력서를 하나둘씩 열어본다.
우리 회사는 블라인드 채용이기 때문에 이력서에 학력이나 앵간한 정보들이 가려져 있다 보니 난 볼거리가 있는 포폴부터 보는 편이다. 이번에 UX팀에 지원한 친구들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했다.
먼저 첫 번째 지원자 포폴을 열어본다.
표지가 화려하다. 뭔가 창의력이 돋보이기 위한 기교를 많이 부린 모양인데 사실 아무런 감흥이 없다. 굳이 꼽는다면 저거 만드려고 고생 엄청 했을 텐데 아무것도 안 느껴져서 미안하다는 정도?
페이지를 넘겼더니 느닷없이 자기소개가 나온다. 분명 자소서에 넣으면 될 내용인데 포폴에 이게 왜 있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불편하다. 평소대로면 그냥 있어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 ‘아니 포폴에 뭘 이딴 걸 넣어~’라면서 웃어 넘길일도 오늘은 피곤한 모양인지 불만이 나온다.
문서에는 그 목적에 맞는 문서의 내용만 담겼으면 좋겠는데, 괜히 이런저런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애들이 꼭 이렇게 목적에도 안 맞는 내용들이 들어가 있어서 사람을 번거롭게 한다. 나중에 실무를 시켜도 이런 괜한 사족이 많은 스타일일까? 흠…
아무래도 나도 상당한 꼰대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대학시절 아무것도 모를 때는 대체 포폴에 뭘 넣어야 할지도 몰라서 고민하던 개구리 올챙이일 적 기억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페이지를 넘기니 이제야 첫 프로젝트 타이틀이 보인다.
[올바른 투자를 위한 주식거래 플랫폼]
다른 설명도 없이 대뜸 저거다. 뭔가 UI 결과물이 샘플처럼 들어가 있긴 한데 뭔가 감도 안 온다. 그래 요새 증시 좋지 않아서 나도 파란불이 켜져 있는데 뭔가 탈출구를 신선하게 제시하나? 그래도 무슨 생각인지 한 번은 참아보자. 페이지를 넘겨 데스크 리서치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뭐가 뭐가 글자가 가득한데 문장 구성도 뭔가 조악해서 의미를 해석하기도 쉽지 않은데, 결론이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여러 문단의 정보를 읽고 여기서 말하는 게 ‘지금 주식 시장의 성장에 따라 젊은 사람의 투자자 비중이 높아진 가운데, 올바르지 못한 주식 투자로 인해 손실이 크다.’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더욱 화가 났다.
아니 뭐 개나 소나 아는 상식을 대단한 걸 발견한 것 마냥 이렇게 장황하게 써놓은 거지? 최소한 그 올바르지 못한 주식 투자가 뭔지에 대해서는 정의를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를 무시하는 건가? 그 순간 문자가 왔다.
강남 땡땡치킨, 54,000원 카드결제.
이건 팀장 놈의 잘못이다. 이런 걸 걸렀다고 하고 내게 올려놓고 지금 치맥을 먹고 있는… 이건 필시 이놈이 나를 무시하는 것 일터다. 물론 몇 장 더 넘겨보면 내가 기대하는 그런 내용이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내 인내력은 여기서 끝이다.
평소 부하직원이 우물쭈물 대며 보고를 할 땐 살짝 눈을 감고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해봐,라고 단칼에 잘라내던 나이기에 이만큼 페이지를 넘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원자 입장에서야 억울하겠지. 자기에게 제대로 된 기회도 주지 못하고 한 사람으로 바로설 기회조차 온당하게 부여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오늘 하루 피곤했던 덕분이지 내 머릿속에서 혼자 가상의 항변을 하고 있었다.
‘네가 보기엔 내가 절대 갑이고 기회 하나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 갑질하는 꼰대로 보여? 하지만 네가 어떤 준비를 해왔고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내가 모르는 것처럼 너도 내가 어떤 하루를 살았는지 어떻게 고생하는지 아무것도 모르잖아? 난 그저 우리 조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을 뽑고 싶을 뿐이야. 하나라도 덜 가르쳐도 되고, 어느 정도 눈치가 있고 가르칠만한 싹수가 있는 놈을 뽑아서 일하고 싶어. 그래야 내가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하고, 오늘처럼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할 일도 적어지니까. 나도 퇴근하면 집에 가서 티브이 보면서 맥주 한잔 까놓고 어린 딸아이랑 학교에서 있던 이야기도 물어보고 친한 친구는 생겼는지 오늘은 무슨 점심을 먹었는지도 물어보고 싶을 뿐이야.’
지나치며 봤던 유머 프로그램에서 신입이 대체 경험을 어디서 쌓냐는 농담으로 면접관을 희화화하는 장면이 오버랩되며 속이 쓰리다.
더 늦기 전에 김밥이나 햄버거라도 사 와야 하나, 아니면 일찍 마무리하고 집에 가서 늦은 저녁을 먹어야 하나 고민을 하면서 다른 포폴을 하나 더 열었다.
담백한 표지에 자신의 포폴에 담긴 프로젝트 인덱스를 요약해서 넣었다. 사실 주제 타이틀만 있는 인덱스를 보면서 좀 더 직관적인 이해가 가능한 내용이 보태졌으면 하는 소망이 샘솟았지만, 방금 전의 포폴과 비교가 되기 때문이었을까 그래도 수긍이 되는 느낌이다.
페이지를 넘겨보니 바로 표지가 나왔다. 뭔가 시원시원한 우리 심대리랑 대화를 하는 느낌.
[맥도널드 앱 통합 및 UX개선 프로젝트]
overview : 기존 맥딜리버리 앱을 개선한 이 프로젝트는 이탈률을 높이는 파편화된 앱과 이중가격 문제를 해결하고 코어 타깃의 단체 주문 니즈를 반영하여 편리하고 재밌고 풍성한 혜택의 긍정적 단체 주문 경험을 제공합니다.
문장이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적어도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는 알겠다.
순간 지난주 점심에 박 과장이 바쁘니까 사무실에서 먹자고 햄버거 주문을 받던 날이 떠오른다. 분명 난 감튀 빼고 스낵랩 추가했는데 그냥 감튀를 가져다주었더랬지. 콜라도 제로콜라가 아니었어. 그런 단체 주문을 어떻게 좀 더 편하게 하는 서비스일까?
페이지를 넘겨 데스크 리서치를 보니 감정이입이 더 되는 느낌이었다.
내용을 보면, 햄버거 집이 배민 같은 배달앱에 올릴 땐 실제 매장하고 비용도 다르고 배달비도 비싸다 보니 가격에 대한 혼동과 불편이 조금 있다더라, 그래서 최근에는 우리 같은 직장인이나 대학 동아리처럼 단체로 있을 때 배달 공구들을 종종 하는데, 여기서 주문 메뉴가 섞이거나 나중에 정산할 때도 돈을 제대로 못 받는 등의 문제가 있단다.
전문적인 분석방법이나 기술적인 부분들을 논하기 전에 이미 감정몰입이 쉽게 된다.
이 친구 조금 관심이 간다.
저자 aiden의 UXUI 포트폴리오 온라인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