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과거의 기억에 확신하는가 >
< 작가 소개 >
저자 : 줄리언 반스
출생 : 1946.01.19. 영국 (현존하는 영국의 대표적인 현대문학 작가)
학력 : 옥스퍼드 대학교 모들린 칼리지 근대유럽어학 학사
수상 : 2011년 부커상 픽션부문
2011년 데이비드 코엔상
1993년 셰익스피어상
경력 : 1969~1972 옥스포드 영어사전 증보판 편찬
( 출처 : 네이버 )
< 이 책을 읽게 된 계기 >
2011년에 줄리언 반스에게 맨부커상을 안겨주었던 책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번역:최세희)
몇 년 전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보게 된 영화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가 동명 소설이 원작이라는 걸 알고 그 뒤 초판본 책으로 읽었다.
영화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왔던 결말 때문에 책을 덮자마자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 두 번을 읽었던 책이다.
그렇게 나는 작가 줄리언 반스에게 매료되었다.
몇 년이 흐른 지금, 최근에 줄리언 반스의 새 작품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가 출간되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간쯤에서 도저히 진도가 안나가는거다.
대체 이게 뭐지?
분명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단숨에 읽힐 만큼 위트와 해학이 있었는데 이 책은 왜 이리 읽기가 버겁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내 손이 저절로 [예감은…]을 펼치고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2023년 개정판이다.
(개인적으로 표지는 대문에 걸려있는 2012년 초판본이 더 맘에 든다.)
세 번째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처음에 읽었을 때의 감흥이 여전히 살아있어서 참 신기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결말을 향해 다가갈수록 나도 모르게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마치 달콤한 사탕이 입안에서 다 녹아 없어질까봐 천천히 빨아 먹듯이 문장을 곱씹고 아끼며 읽었다.
< 소설의 주요 등장 인물 >
토니 웹스터 : 이 소설의 "화자"로, 콜린과 앨릭스 두 친구와 어울려 다니며 허세와 치기로 가득찼던 학창시절을 회고하는 자칭 평범한 사람이다.
에이드리언 핀 : 토니네 학교로 전학 온 학생으로 '토니, 콜린, 앨릭스'와 함께 친구가 되지만,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만큼이나 영특하고 진지하다.
베로니카 포드 : 토니가 대학에 들어가 사귄 여자 친구이며 미스터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사라 포드 부인 : 베로니카의 어머니. 이 소설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 소설의 아웃 라인 >
특별한 순서 없이, 기억이 떠오른다.
반들반들한 손목 안쪽.
뜨거운 프라이팬이 젖은 싱크대로 비웃듯이 던져지면서 솟아오르는 증기.
방울방울 떨어져 수챗구멍 속을 빙글빙글 돌다가, 층고 높은 집의 기다란 홈통 전체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정액.
터무니없게도 상류로 치닫는 강물, 그 물살과 너울을 좇는 여섯 개의 회중전등.
또 다른 강, 거센 바람이 수면에 물살을 일으켜 물길을 읽을 수 없는 드넓은 잿빛 강.
잠긴 문 뒤의, 오래전에 차갑게 식은 목욕물.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본문 p11)
소설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주인공 토니의 말처럼 특별한 순서 없이 기억의 단편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이 뜬금없어 보이는 문장들 때문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한 편,
책을 덮고 난 뒤엔 이 문장을 다시 돌아와 읽게 된다.
이 소설은,
토니가 학창시절 그 나이 때만 누릴 수 있는 치기 어린 반항과 장난기로 가득 찬 친구들과의 우정을 나누며 평범하게 지내다가 대학에 들어간 뒤 사귀게 된 여자 친구 베로니카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얽키고설킨 인생 전반을 노년에 기억하며 쓴 회고록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볼 때 토니는 좋게 말하면 천진난만하고 나쁘게 표현하면 사유할 줄 모르는 단세포 멍청이다.
반면에 베로니카는, 아니 토니가 아는 베로니카는 내가 봐도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 그 자체다.
자기의 의견이나 속 뜻은 얘기하지 않고 마치 상대가 당연히 알아야할 것들을 놓친 것처럼 언제나 토니를 책망한다.
"너는 너만 아는 나쁜 놈이야." 라든가 "넌 여전히 감을 못 잡는구나." 하는
결국 둘 사이는 깨졌고 그 뒤 공교롭게도 토니가 생각한 최고의 지성인 친구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사귀어도 괜찮은지를 묻는 편지를 보내왔다.
토니는 쿨한 척하며 속은 쓰리지만 둘의 사이를 축복한다는 뜻의 답장을 보냈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이 편지의 파장이 이 소설의 핵심이자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충격적이다.
토니의 기억과 실제로 보낸 편지의 내용이 너무나 극과 극을 달리기 때문이다.
토니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고 할 때쯤 에이드리언의 자살 비보를 접하게 된다.
학창 시절 "원칙이 행동을 이끌어야 한다는 관념에 근거해 우리에게 사유를 인생에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도록 촉구"(p21) 했던 에이드리언이 자신의 자살 이유를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24살 꽃다운 나이에 죽어버린 것이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본문 p86)
-> 나는 동의하지 않는 논리, 아니 궤변이라고 생각하지만 죽음 앞에서 이렇게 이성적인 사유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가능한지 의문이다.
에이드리언의 죽음 이후 40년 쯤 세월이 흐른 뒤 베로니카의 모친, 포드 부인이 사망하면서 토니에게 유품을 남겼다.
현금 500파운드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
그런데 그 일기장을 베로니카가 넘겨주지 않는 바람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니는 베로니카를 어렵사리 만나게 된다.
왜 베로니카의 모친이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갖고 있었으며, 현금 500파운드와 일기장을 토니에게 남겼는지도 미스터리지만 베로니카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넘겨주기는 커녕 태워버렸다고 하는 바람에 토니는 온통 혼란 그 자체에 빠진다.
토니는 한 때 마거릿과 결혼해 딸 수지를 낳았고, 수지가 결혼해 손주 둘을 얻었지만 현재 토니는 이혼한 채 혼자 살고 있다.
전처 마거릿과는 가끔씩 만나 점심을 같이 먹으며 고민거리를 나눌 정도의 친구 사이로 지낸다.
마거릿은 모든 면에서 명확한 걸 좋아하고, 베로니카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성격을 지녔다.
전혀 다른 두 성격의 여자가 토니의 인생에 가장 큰 두 획을 그은 셈이다.
이제 홀로 지내는 토니는 베로니카를 40년 만에 만나서 그들이 한때 사랑했던 청춘 시절을 회고하고 약간의 설레임까지 가지지만 결론은,
"베로니카의 의중을 헤아리는건 40년 전에도 못 했던 골치거리였다"이다.
반전의 결말로 인해 토니는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는 소설의 맨 앞 장에 나열했던 기억의 파편들을 다시금 허공에 띄우며 생각한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p249)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났다.
< 소설의 주제 >
작가 줄리언 반스는 이 소설을 통해 줄곧 "인간의 기억의 한계와 그 기억조차 얼마나 왜곡되고 편집되는지"를 이야기한다.
책에 나왔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기록이 만나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본문 p33)
-> 고등학교 역사 수업시간에 선생이 던진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못할 때 에이드리언은 이렇게 답했다.
(이거 고등학생 수준 맞아? 이런 느낌…? 선생 역시 자신의 밥줄이 끊길 위기를 느낄 정도로 놀란 것 같다고 토니는 회상한다.)
역사는 살아 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
(본문 p99)
-> 에이드리언의 죽음 이후 노년에 접어든 토니가 생각한 역사관. 학창시절엔 ’승자의 거짓말‘ 이라고 답했지만 이젠 바뀌었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본문 p138)
-> 토니의 전 여친 베로니카의 오빠 잭 포드로 부터 베로니카의 이메일 주소를 받고 잭에 대한 토니의 생각이 바뀐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 이 책 세 번 읽고 느낀 세 가지 의문점 >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째,
에이드리언의 자살 이유가 자신이 바라지 않은 선물을 포기하겠다는 결정에 의한 행동이라고 말했지만
책임 회피를 위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 점은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난 다음 만나게 될 어이없는 결과로 인해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다.)
둘째,
토니의 편지 내용과 소설의 반전 결과물의 인과 관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낄 때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 인간의 보편적 본능일까?
타인의 불행 앞에 누군가 일말의 책임감을 갖는건, 생각없이 던진 작은 돌팔매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A와 B가 과거에 추억을 함께 쌓았던 사이일지라도 세월이 흐른 뒤 A와 B에게 일어난 각각의 사건이
주술적으로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을 수 있는걸까?
셋째,
왜 제목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라고 했을까?
여기서 예감을 의미하는 내용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베로니카가 지적했던대로 토니는 예감은 커녕 아무 것도 감을 잡지 못했다.
보이는 것만으로는 상황 파악이 전혀 안되는, 한마디로 눈치코치 없는 인간이다.
그런 사람이 인생을 회고하면서 대체 뭘 예감했다는걸까?
책의 원제목은 'The Sense of an Ending' 이다.
직역하면 '결말의 느낌, 결말의 의미' 정도가 될 것이다.
결말의 느낌이라해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라는 문장과는 상당한 괴리가 느껴진다.
결말의 느낌은 확신할 순 없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추측의 의미이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확언에 가깝기 때문이다.
*** 스스로 멍청한 늙은이라고 자처한 우리의 평범한 소시민 토니를 통해
작가 줄리언 반스의 철학적 사유를 쉽고 재미있게 접해보시길 강추!합니다.
소설 자체가 아주 짧고 임팩트 있어서 금방 읽혀요~^^ ***
제 목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저 자 : 줄리언 반스
출 판 : 다산북스
발 행 : 2019.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