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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혁민 Feb 19. 2018

[시지프 신화 - 알베르 카뮈]

인간 + 세상 = 부조리

우리는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영원하지 않은 우리의 삶은 언젠가 죽는다. 알아도 다 안다고 할 수 없고 언젠가 세상에서 죽고 사라질 나를 생각하면 참으로 허무하고 살아서 뭐하나 싶다. 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삶을 깨달은 지금 이 생에서 그만 손 털고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 옳을까.

그러나 카뮈는 삶의 덧없음을 깨달음의 끝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그렇다고 그것에서 어떤 의미나 희망을 찾아내거나 절망감에 빠져 자살하거나 두려움에 회피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 부조리가 종착점이 아닌 출발점이다.

부조리란 우리의 이성으로 마땅히 기대하는 결과와 실제로 마주한 것을 비교할 때 만들어진다. 즉 부조리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바람과 세상의 차가운 대답이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세 개의 항 중, 그 어느 하나라도 없어지거나 어느 한쪽에 지나치게 무게를 실으면 부조리도 사라진다. 그래서 자살은 부조리를 제대로 바라보고 내린 대답이 아니라, 회피이자 굴복하는 것이다. 아무리 불편해도 무작정 파괴하는 것이 최선의 답이라고 할 수 없다. 그가 '부조리의 추론’에서 언급하는 철학자들(야스퍼스, 셰스토프, 후설, 키르케고르 등)도 자신의 생명을 끊지는 않았지만, 부조리를 신성화하거나 영원한 이성에 손을 드는 등의 ‘철학적 자살’을 저질렀다.

카뮈는 이 부조리를 대면하는 데에 있어서, 영원과 자유 같은 기존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접어두고 오직 자신의 눈과 몸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자명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현존하는 육체가 글 내내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어떤 보편적인 진리를 설명하는 태도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말한다. 세상에서 내가 직접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만큼 나에게 진실된 것이 있을까. ‘부조리’라는 소재 덕분에 교양서적 같은 내용을 기대를 하고 읽었지만, 볼수록 문학작품 같은 느낌을 받았다. 책 표지에 ‘철학적 산문시’라는 소개가 이해되었다.


P.13
다음의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금세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을 우리 눈으로 목도할 수 있는 어떤 부조리의 감성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시대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그 어떤 부조리의 철학이 아니다.


p.86
나는 형이상학적 자유의 문제에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나 자신의 자유를 경험할 따름이다. 이 자유에 대하여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라 몇 가지 분명한 단편적 모습이다.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는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는 삶의 진실에 눈을 뜨면서 깨어나는 상태로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영화 ‘매트릭스’가 떠올랐다. 순간순간 현실 세계의 부름을 듣는 네오처럼, 무의식적으로 습관처럼 삶을 살아가다가, 의식이 깨어나면서 내가 낯설어지고 세상이 전과 달리 보이는 것이다. 빨간약과 파란 약을 고르라는 모피어스와 같이 카뮈도 두 가지 길을 말한다. 환상이 만들어낸 울타리 속에서 착각에 빠져 살 것인가, 부조리의 진실을 대면하면서 저항하는 그 삶 속에서 진짜 너의 인생을 살 것인가.


p.88
...... 이리하여 부조리의 인간은 자신이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다 분명하게 말하면 나의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가짐으로써, 나만의 진리, 존재하는 방식 혹은 창조하는 방식에 부심함으로써, 그리고 끝으로 나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삶에 의미가 있다고 시인한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나는 스스로에게 온갖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나의 삶을 가두는 것이다.



차라리 우리가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자유와 힘든 오늘을 견딜 수 있는 희망이 더 멋들어진 관점 같아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영원의 보장도 없이 충만한 의미의 자유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p.88)? 모든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들은 삶의 죽음 앞에서 무색해질 뿐이다. 카뮈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영원과 자유라는 환상에서 벗어난 부조리의 삶이야 말로 진정 자유로운 삶이라고 역설한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끊임없이 의식의 날을 세워서 두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며, 진실에 등 돌린 채 편안하고 따뜻한 영원성으로 다시 돌아가 숨고 싶어 하는 생각과 싸워야 한다.

그는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자세로서 열정을 말하는데 논리가 흥미롭다. 어떤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시대에 따라 변하고 애매모호한 관념을 기준으로 한 것일 뿐이다. 부조리의 삶에서는 그런 가치 판단은 의미 없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오로지 내가 육적으로 경험하고 확실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부조리의 삶에서는 잘 사는 것보다, 많이 경험하고 느낄 열정이 중요해진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삶을 빨리 마감하는 것은 손해이고 바보 같은 짓이다. 삶의 부조리는 자살을 명하지 않는다.

정리해보면 합리성을 요구하는 인간의 이성과 비합리적인 세상이 빚어내는 것이 부조리다. 대표적인 예로는 인간의 삶에서 삶에 대한 의지보다 더 강하고 필연적인 죽음이 있겠다.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고 부조리도 없고 더 이상 논의할 것도 없다. 부조리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자 인간의 삶의 일부다.

이 부조리는 환상의 틀에 갇혀있던 삶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지만(자유), 이 부조리를 대면하는 부조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처절한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도록 노력해야 하고(저항), 그 속에서 오히려 많고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려는 열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관념 속 세상이 아닌 인간이 그 육체로서 몸소 경험할 수 있는 인간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여성과 사랑을 나눈 돈 후안도, 수많은 사람의 삶을 체험하는 배우도, ‘육체’라는 하나의 확신을 믿고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투쟁하는 정복자도, 다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창작에서도 그는 부조리를 찾는데, 그야말로 가장 부조리한 활동이며 인생의 무용성을 몸소 실천한다고 본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이야기를 써도, 그 사건과 등장인물들은 실재하지 않는다.

소설에 대한 카뮈의 관점도 흥미롭다. 그는 어떤 교훈이나 희망을 주는 글들을 반대한다. 그것은 부조리의 정신과 맞지 않다. 오로지 현존하는 육체가 보고 느낄 수 있는 진실만을 그리는 것, 관념에서 시작한 글이 아닌 눈에 보이는 한 ‘이미지’로서 그리는 것, 미래에 대한 희망과 영원성에 저항하면서, 다양한 인간의 삶을 그려야 한다. 개인적으로 쉬이 납득이 되지 않았는데, 카뮈가 ‘소설은 이래야 된다!’하고 단정 지었다기보다 개인적인 그의 문학관 또는 부조리의 소설이라는 장르로 한정 지으면 될 것 같다.


p.174
사고가 그것 자체로 되돌아오는 어느 지점에서, 그들은 한계를 지닌, 치명적이고 반항적인 어떤 사고의 명백한 상징들로서 작품의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부조리를 삶의 진실로 여기고 그 삶을 살아간 인간상을 보여주고 그중에서도 가장 부조리다운 창조를 얘기한 뒤, 카뮈는 시지프 신화로 마무리 짓는다. 이제 시지프는 더 이상 끝없는 무의미한 벌을 받는 불행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자기 판단에 따라 마음대로 삶을 살았다. 결국 신이 내린 그 벌은 그에게 마땅한 운명이었을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끝없이 그 행동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만 끝내주길 신에게 빌지 않았다. 부조리의 삶에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다만 그것을 책임질 뿐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를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날들에는 시지프가 고통스러워하면서 산을 내려오지만 그는 또한 기쁨 속에서 내려올 수도(p.183)’ 있는 것이다. 비극적인 운명을 깨닫지만, 오히려 그걸 알고 난 뒤 자신의 손을 잡은 젊은 딸(안티고네)을 보며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하는 오이디푸스처럼.


P.184
그 한마디가 운명을 인간의 문제로, 인간들 사이에서 처리해야 할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만만치 않았던 책이다. 처음에 읽고는, 읽어왔던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아무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분량이 길지가 않아, 두 번 읽어볼 마음이 들어서 다시 찬찬히 나름 인내심을 갖고 이래저래 필기도 하면서 봤다. 그래서 어느 정도 흐름은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감히 ‘시지프 신화’를 기준으로 내가 책을 읽는 버릇이 달라졌다고 봐도 되겠다.

부조리한 창작은 오직 삶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것인지, 그럼 너무 단조롭고 건조하지 않을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뮈의 작품들인 '이방인', '칼리굴라', '오해' 등을 읽어봐야 하겠다.

오직 인간만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매력을 느끼지만, 그래도 삶의 무용성을 안고 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살짝 김이 새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직 나는 이런 삶의 부조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듯하다. 카뮈처럼 죽음의 문턱에 가거나, 굴곡이 많은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읽었던, 삶의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들과 그 자살을 돕는 인물이 등장하는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도 떠오른다. 그리고 전에 아무 생각 없이 읽었던 ‘이방인’을 다시 읽어볼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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