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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혁민 Feb 26. 2018

[이방인 - 알베르 카뮈]

삶의 진실에 눈을 뜬 부조리의 인간

몇 년 전 EBS로 최태성의 한국사 강의를 들었었다. 매 강의마다 어록이 있을 정도인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그 내용을 기억에 의존해 각색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 잘 보세요. ‘삼강행실도’에 어떤 내용이 있었냐면 ‘효자’, ‘충신’, ‘열녀’ 이렇게 있어요. 그중에 ‘열녀’가 참 재밌는데요. 자, 지금 우리 학생들이나 여성들에게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따라 죽어야 합니다”라고 가르치면 어떤 소리를 들을까요? 그렇죠. 바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거예요. 요즘 어떤 시대인데, 그죠? 그런데 말이에요 조선시대에는 그걸 나라에서 가르치고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왜?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조성이 되었고 어릴 때부터 그 문화 속에서 그 가치관이 스며든 것이죠. 지금 여러분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한 번 돌아보세요. 그게 정말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도 마땅한가요? 아니면 사회가 만든 규칙을 따른 것에 불과할까요?

물론 특정 시대와 사회 속에 살면서, 그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나만의 가치관을 갖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만든 규칙을 따르기만 하는 삶도 내가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이 세상에 떨어져 그냥 존재하는 것일까, 정말로 내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기도 싫지만 그 물결을 바꾸려는 생각 또한 무모하고 경솔해 보인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생각을 주제로, 가장 강렬한 여운을 남긴 작품이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다. 그는 부조리를 통해 개인이 살아갈 인간만의 영역을 나타내 보였다. 그리고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가 부조리의 사상을 설명했다면, ‘이방인’은 부조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그려낸 이야기이다.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뫼르소’는 ‘시지프 신화’에서 말하는 ‘부조리의 인간’과 같은 삶의 태도를 갖고 있다.

일단 부조리부터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부조리라는 사상 혹은 감정은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에 대한 회의가 짙어지던 시기와 관련이 있다. 아무리 긴 세월 동안 많은 것을 알고 사상적으로 발전해도 그때와 다름없이 아니 더 잔인하고 참혹한 일을 저지르는 인간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렇게 찬양한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은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무엇을 했나. 부조리는 인간의 바람과 이를 무참히 짓밟는 결과의 간극에서 생겨난다.

어쨌든 이런 의문들은 결국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건드릴 수밖에 없다. 바로 인간의 삶 자체가 가지는 부조리, 죽음이다. 특히 카뮈의 부조리는 개인적인 경험(17살 때 폐렴으로 죽음의 문턱에 갔음)으로 이 주제는 빠질 수 없다. 죽음은 우리의 선택으로 없앨 수 없는, 삶이 마주해야 할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이 앞에서는 모든 것이 동등하다. 떵떵거리는 임금도 빌어먹는 거지도 죽으면 끝이다. 결과가 똑같다면 그 누가 열심히 살려고 할까.

그러나 삶에 대한 의욕을 떨어뜨리는 이 부조리는 인간의 삶이 시작되면서부터 함께 해온 불편한 진실이며 선험적인 조건이다. 문제는 ‘영원’이나 ‘자유’ 같은 환상으로 이 진실을 외면하고 스스로를 속여왔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사실에 보다 큰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를 깨닫고 진실에 눈을 뜬 부조리의 인간을 말한다. 부조리의 인간은 어떤 만들어낸 관념 속 환상에서 위안을 받지 않고 오직 현존하는 육체로 경험하고 느끼는 것만을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이며, 신의 구원을 바라지 않고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결과를 책임지며 살아간다.

그럼 뫼르소가 살아가는 부조리의 삶은 어떨까.


p.9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서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시작부터 죽음이 등장한다. 마치 낯선 타인의 죽음처럼 무덤덤하게 엄마의 죽음을 말한다. 뫼르소에겐 엄마의 죽음도 특별하지 않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자신이 저지른 것도 아니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기 마련이니까. 물론 더 오래 사셨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건 엄마가 죽은 사실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p.15
나는 커피를 마셨다. 그러자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시신 앞에서 담배를 피워도 좋을지 어떨지 몰라 망설였다. 생각해 보니, 조금도 꺼릴 이유는 없었다.

p.32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어째 그의 행동은 시선을 끌고 신경에 거슬린다. 그의 애인 마리가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도 그는 어떤 결정도 다 괜찮다는 태도다. 뫼르소에겐 사랑은 만나고 함께 하고 싶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름답고 영원한 사랑은 그에겐 큰 감흥이 없다. 레몽의 옛 애인을 골탕 먹이고 폭력을 휘두르려는 다소 비도덕적일 수 있는 계획에도,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도 남들을 불편하게 하는 그의 사고 패턴은 한결같다. 그는 사회의 관습과 도덕에 무관심하다. 마치 그 사회 사람이 아닌 것처럼.


p.41
그래도 레몽의 마음에 들도록 힘썼다. 왜냐하면 내게는 레몽의 마음이 들지 않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p.44
조금 뒤에 마리는 나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나는 대답했다.

p.52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 나는, 그런 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정 원한다면 결혼을 해도 좋다고 설명을 했다. 게다가 결혼을 요구한 것은 그녀 쪽이고, 나는 그저 승낙을 했을 뿐이다.


관습을 넘어 모든 것을 허용하는 그의 태도는 어찌 보면, 삶에 관심도 딱히 바라는 것도 의욕도 없어 무기력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런 인물은 아니다. 더운 날에는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때때로 여자 친구를 향해 정욕을 느끼고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보인다. 게다가 친구와 달리는 화물차에 올라타는 격한 놀이(?)도 즐긴다.

그에게 삶이란, 몸으로 경험하고 보이는 그대로 사고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저것보다 가치 있다는 판단은 그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존하는 육체만을 믿고 살아가는 부조리의 인간이다.

1부에서 뫼르소의 행동에서 느꼈던 불편함은 2부에서 오히려 그를 둘러싼 주변으로 옮겨간다. 그의 태도는 사회에 필요 이상으로 거리를 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심문이 시작되면서 우연적으로 벌어진 살인 사건에 지나친 논리와 개연성을 요구하는 재판이 더 우스꽝스러웠다. 사회는 진실을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관습과 도덕으로 덮어버렸고 그래야 만족하는 듯했다.

뫼르소는, 재판이 살인 사건이라는 본질보다 그의 사생활에 더 관심을 쏟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살인보다 그 외적인 이유로 그를 심판하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지막 사형선고를 받고 할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체념이었을까. 그 와중에도 지나치게 밝고 뜨거운 햇빛과 살인이라는 우연에서 나름 논리적인 이유와 과정을 창조해낸 재판을, 그것 또한 반박할 거리가 딱히 없는 논리라는 점에서, 그냥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상황에서 배심원들에게 그가 가진 삶의 태도를 설명한들 무엇이 바뀔까. 남은 것은 지극히 모호한 관념에 의거해 언도되었지만 이제는 확실하고 심각해진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든 받아들이는 것이다.

뫼르소는 마지막에 부속 사제를 만나기 전까지, 그래도 억울한 사형과 생각보다 일찍 찾아온 죽음을 피하고자 이런저런  쓸데없는 가정과 계획과 희망에 몰두해 본다. 그러나 결국 그는 어차피 죽을 운명이고 혹시 살 수 있었을지 모를 삶을 가정해봐도 죽음 앞에서는 지금과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라 결론을 내린다. 살아있고 삶의 의지가 있는 한, 어떤 죽음이든 그것이 어떻게 찾아오든 불합리하게 다가오고 거기서 역시 부조리를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는 삶을 포기한 게 아니다. 오히려 삶의 진실을 경험하면서 죽기 직전까지 묘한 해방감과 자유를 느낀다. 바로 엄마가 죽기 전에 느꼈을지도 모르는 감정이다.


p.126
요컨대 그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지금이건 이십 년 후건 언제나 죽게 될 사람은 바로 나다.

p.132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어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p. 136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시지프 신화) p.85
편협하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인간의 지성이 자신을 넘어서는 현실을 부둥켜안고 대결하는 광경보다 아름다운 광경은 없을 것이다. 인간적 오만이 펼쳐 보이는 그 광경은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것이다. 정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이 규율, 불속에서 통째로 단련해 낸 이 의지 그리고 정면 대결에는 무엇인가 강력하고 비범한 것이 있다.


뫼르소는 영웅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하지만 예정보다 일찍 맞이하게 된 죽음 앞에서도 이를 부인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바라보고 맞서는 그의 모습,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 앞에서 굴복하고 용서를 빌지 않고 초연히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또 다른 시지프였다. 짧은 생을 살다 가게 되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진하게 자기만의 삶을 찾아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삶에서 오직 믿을 수 있는 것은 직접 경험하고 느끼는 내 몸뚱어리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명한 사실이며 그 믿음에서, 비록 거대한 흐름에 쓸려 가더라도 내 삶의 키를 내가 쥐고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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