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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리터리박스 Jan 23. 2018

한국전쟁 253전 253승 불패신화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고맙습니다...

"우리 에티오피아가 항상 추구하고 있는 세계평화를 위한 집단아보라는 이 신성한 세계정책을 실현하고 보호하기위해 그대들은 오늘 장도에 오르는 것이다.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때까지 싸워라."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의훈시-



6.25 전쟁은 쉽게 잊힐 수 없는 우리의 아픈역사이자 우리가 꼭 알아야할 역사이기도 합니다.  6.25전쟁으로 인하여 우리 겨레의 역사는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6.25전쟁은 우리에게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슬픔을 남겼습니다. 한반도 전체가 잿더미로 변했고 이산가족의 슬픔과 고통은 오늘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1950년 6월 28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 역사상 최초로 군대를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7월1일 미군의 참전을 시작으로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하고 5개 국가가 의료부대 및 시설을 지원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낯선나라.... 낯선 사람들의 전쟁에 참여한 이들에게도 전쟁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고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유엔의 결정에 따라 미국,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하여 총 16개 국이 참가하여 다국적군이 편성이 됩니다. 이들이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는 대한민국을 위해 병력을 파견하였고 이역 만 리에서 적지않은 피를 흘린 이유는 정치 안보적인 이유도 있고 미국과의 관계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는 조금 다릅니다.. 


에티오피아는 터키처럼 직접적으로 소련의 위협을 받는 국가도 아니였고 미국의 원조를 얻기를 위함이나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도 아니였습니다. 모든것을 '이해관계'로만 따지는 국제사회의 현실에서 에티오피아는 정말 순수한 뜻에서 참전한 국가라 할수있습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에티오피아가 참전한 이유는 1935년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에 침공을 당했었습니다. 당시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에 황제는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손을 내밀어주지않았습니다. 결국 에티오피아인 27만명이 숨졌고 나라까지 뺴앗겼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 투쟁하였고 1941년에 기적적으로 승리해 결국 이탈리아를 몰아냈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도움을 받지 못한 설움을 잘아는 셀라시에 황제는 1953년 UN의 파병요청을 받자 흔쾌히 한국에 병력을 보내게 된것입니다. 그렇게 에티오피아의 참전을 주도한 사람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였습니다.  


"침략군에 부당하게 공격 당한 나라가 있다면 다른 나라들이 도와줘야 한다. 저 먼 곳에 있는 한국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워라"


강뉴부대 사열중인 황제 모습


당시 에티오피아군은 총 4개정규 사단 5만명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최정예부대라 할 수 있는 황제직속의 제 1근위 사단에서 지원자들을 모아 1개 대대를 편성합니다. 그리고 황제는 그 자리에서 "강뉴대대(Kagnew Battalion)"라는 칭호를 내립니다. 강뉴의 뜻은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 또는 '적을 초전에 격파하다'라는 두가지의미가 있습니다. 공산집단의 침략을 격파하고 혼돈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원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담겨있습니다.



그렇게 1951년 5월 7일 부산에 도착하여 미 제7사단32연대 예하대대로 배정받습니다. 1956년에 완전히 철수할때까지 5차례에 걸쳐 연 인원 6.037명이 파견되어 전사자 121명,부상자 536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강뉴부대는 적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들은 정찰 간 적과의 교전을 비롯해 고지탈환과 사수,진지방어 등 253번의 크고작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는 저력을 발휘하였고 특히 1952년 10월 금화지구 '철의 삼각지'를 사수한 것은 이들의 용맹성을 잘 보여줍니다. 강뉴부대는 철의 삼각지로 오는 주 저지선 계곡에 1개 중대를 배치했습니다.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의 고격은 집요했지만 강뉴부대는 4시간동안 백병전을 벌여 적들을 물리쳤습니다.



강뉴부대원들은 부대가 위험에 처하면 장교와 부사관들이 가장 먼저 적진으로 돌진해 포위망을 뚫었습니다. 전투 중 부상자와 사망자를 전장에 남겨두지 않았으며 포로가 발생하면 끝까지 추적해 구출했습니다. 



파병 장병들에게 내린 셀라시에 황제의 명령 "버아셔너프 터멀리셔"(이길떄까지 싸워라. 그러지않으면 죽을때까지 싸워라)를 이들은 절대 충성으로 결행했습니다. 


당시 미7사단장 아더 트루도


이들은 지휘했던 미 제7사단장 아더 트루도는 이들에 대해 유엔군에서 가장 용맹한 부대라며 극찬을 하였고 이승만 대통령 역시 1953년 7월 27일 강뉴부대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습니다. 그렇게 에티오피아는 종전후에도 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한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는 셀라시에 황제


한국전쟁 종전 후 셀라시에 황제는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고 부산 유엔공원에 방문하여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영웅들의 넋을 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강뉴부대 용사들에겐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7년간의 극심한 가뭄이 생기며 목축업이 주요산업이었던 에티오피아는 한순간에 최빈국으로 떨어져 버리고 수만명이 기근으로 죽어갔으며 1974년 군부 쿠데타가 일으킨 공산주의 정권은 북한군과 싸웠다는 이유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핍팍하였습니다. 그렇게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 한국과도 단교과 되었습니다. 하지만 용사들은 한국전쟁 참전을 후회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지나 1991년 멩기스투정권이 붕괴되고 다시 민주정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강뉴부대를 찾았고 뒤늦게나마 노병이 된 그들을 지원하는 법안을 마련하여 시행하였습니다. 군은 물론이고 민간차원에서 지원활동이 활발해졌습니다.아직까지도 그들은 자신들의 한국전쟁 참전을 자랑스러워 하고있고 또 다시 한국이 위험에 처한다면 도와주러 갈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비록 온몸에 총탄이 박히고 팔,다리를 잃었지만 한반도의 자유를 위해 싸운 자부심으로 한 평생 살아왔습니다. 가난이 대물림돼 자식 교육도 못 시키고 있지만 한국이 발전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흐믓합니다."

-한국전쟁참전용사 쉬퍼로우 게브레 볼드-



"한국이 잘 살게 됐다니....내가 더 고맙다 우리는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 부른다"

-한국전쟁참전용사 테레다 메르샤-



"6.25전쟁때 유옥가스 때문에 폐까지 손상돼 아직까지도 힘듭니다. 그런데 한국에 전쟁이 다시나면 지금도 가서 도와주고 싶습니다"

-한국전쟁참전용사 타파라미타우-



우리는 압니다. 에티오피아가 얼마나 가난한 나라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에티오피아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지... 

그렇게 60년이 지나 그들은 우리 뇌리에서 잊혀가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희생은 두고두고 잊지않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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