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는 49km, 일본과는 138km 떨어져 있는 바다에 떠 있는 섬, 일본보다 3배는 더 우리나라에 가깝게 위치한 대마도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널리 알려지고 많이 찾게 된 것은 권비영 작가의 ‘덕혜옹주’ 때문이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조차도 없었던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가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가는 배가, 근래 일어난 '일본 불매운동' 전에만 해도 매일 만선이 될 정도로 우리를 불러들였다.
고종의 나이 60에 태어난 덕혜옹주는 얼마나 고종의 귀염을 받았을까. 그러나 나라의 몰락으로, 고종의 죽음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조선의 옹주에게는 더 이상 방패가 되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오빠들처럼 일본으로 끌려가, 거기서 교육을 받고, 일본 황족의 혈손인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패망하였다. 그 이후 오래전 일본으로 데려온 조선의 어린 왕녀의 존재는 그들의 안중에는 없었다.
조선에서도 광복이 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어, 정치인들은 정치인대로, 평민은 평민대로 전쟁 후의 어려운 생활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으니 어느 누구가 그녀를 기억하고 있겠는가. 오직 그녀 혼자서 견뎌야만 했다. 어릴 때 환경적인 요소로 약하게 느끼고 있던 정신분열 증세는 불안한 환경에서 더욱 가중되었는지, 결국은 남편의 손에 이끌려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서울신문의 기자가 덕혜옹주의 귀국을 위해 많이 애썼다고 한다. 그런 노력으로 그녀는 정신병을 가진 채, 51세의 나이에 그녀가 일본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거처했던 낙선재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우리는 가여운 그녀의 일생을 통해, 가엾고 비참했던 조선을 보기 위해 대마도로 간다.
일본 여인 마리아(マリア), 그녀의 이름은 (妙), 할아버지 '유키나가 고니시 류사'때부터 기독교도였다. 그 당시 서양에서 들어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과의 교류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도 태어나면서부터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였다. 후에는 천주당에서 학습을 하는 등,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와 부인의 믿음은 굳건했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마리아 역시 어려서 세례를 받았고, 본명보다 세례명 마리아(マリア)로 자연스레 불렸다.
이 당시, 마리아의 아버지 '고니시 유키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망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바다의 사령관’이라고 불릴 만큼 해상 관리에 탁월하였던 인물이었다. 이런 점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데 선봉장의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혈로 조선을 삼키고자 명나라를 침입하러 가는데 길을 내어 놓으라는 조건으로 조선에 위압을 가하며 회유하고 교섭하는 역할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맡기고 그를 대마도로 파견시켰다. 그와 동시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마리아를 대마도 도주 '소 요시토시'와 혼인하도록 하였다.
유키나가와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는 한동안 조선을 왕래하며 중재와 교섭을 하며 조선을 회유하였지만 실패, 결국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신앙을 이유로,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는 그동안 이어왔던 조선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전쟁을 막고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여러 번 간언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계 정벌의 굳은 야망 아래, 그들의 간언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가 떨어져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사위 대마도 도주 '소 요시토시'는 임진왜란의 선봉장이 된다.
내 생각이지만, 대마도 생활에서의 마리아와 남편 소 요시토시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마리아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전교에도 힘을 쓴 듯하다. 그의 남편 소 요시토시도 타리오(タリオ)란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니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도 조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손에 들어가지 못한 채, 그는 병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대를 이어야 하는데, 그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섭정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가 일어났다. 일본 전국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편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 두 패로 나뉘어 싸우게 된 그 유명한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이 이긴다.
전쟁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는 어느 쪽이든 가담해야만 하는 운명이었고, 그동안 몸담아 왔던 히데요시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히데요시 편에서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그때, 소 요시토시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대마도에 머물면서 그의 군사들만 참전시킨다. 전쟁은 패하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패장의 무장으로써 할복하는 명예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신앙의 근거로, 하느님이 주신 목숨을 스스로 끊지 못한다며 할복하지 않고, 죄인으로서 많은 모욕을 감수하면서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참수시켜 주기를 요청한다.
한편, 대마도에서 소식을 전해 들은 '소 요시토시'는 발 빠르게 그의 안일을 도모한다. 그 첫 번째로 그의 아내 '마리아'를 집에서 내친다. 마리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대항하고 참수당한 장수의 딸이다. 그를 내침으로써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치하로 들어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대마도를 관리하며 임진왜란으로 사이가 갈라진 조선과의 관계 개선 등을 도모하도록 한다. 그 후로 그의 가문은 더 큰 세력으로 확장하게 된다.
그때를 살아보지 않은 나로서는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마리아에 대한 처사는, 대마도 영주 '소 요시토시'의 무자비한 일방적인 내침은 아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마리아가 자신이 몸담아 부부로 살면서 자식을 낳았던, 대대로 대마도 영주로 이어오던 '소 요시토시'의 가문을 위한 스스로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한다. 신앙인으로서 함직한 이유이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해야 내 가슴이 덜 아프기도 하다.
그녀는 나가사키의 한 가톨릭 수도원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5년 후 사망한다. 그와 함께 추방되었던 그의 아들 '고니시 만쇼'는 예수회에 입회하여 수련을 받았고, 1627년 사제서품을 받아 신부가 되었다. 예수회 신부로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신부가 되어 일본으로 돌아와 사제 활동을 하다가 1639년에 순교하였다. 고니시 만쇼 신부가 순교하고 난 후로는 메이지 시대까지 일본 내에 일본인 사제는 탄생하지 않았다. 2008년 동료 순교자 187위와 함께 시복 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아무 죄 없이, 시대의 희생양으로 아프게 살아야만 했던 사람, 그래도 대마도는 그녀를 기억해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아들과 함께 하치만구 신사에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