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피싱이다.

# 할머니와 아이들

by 칠십 살 김순남

"안있나, 할매 이 닦을 때 봤나? 전부 빼갔고 닦는데이, 우습제."

"할매는 우습데이. 모기를 모구라 하고오~ 장난감을 오모짜라하고오~

내보고 오모짜 치아라 하는데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갔고오~ "

까르르 까르르 까르르..


외할머니 집에 놀러 온 7살짜리 외손녀와 6살짜리 친손자가 이불속에 파묻혀 할머니 흉에 한창 흥이 나있다. 하는 말들이 하도 맹랑해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어머니 보기에 민망해 꾹 참고 있는데 오히려 먼저 웃음이 터져 나온 건 어머니 쪽이었다.


"요 녀석들, 모이기만 하면 할매 흉보고"

하시며 나무라는 말씀이 자신의 흉을 보는 손자들이 결코 밉지 않은, 아니 오히려 귀여운듯한 표정이시다. 나도 덩달아 참았던 웃음을 마음 놓고 터뜨렸다. 아- 세월이 이토록 흘렀는지. 8년 전 어느 봄날 그이의 청혼에 꺾이어 면사포를 썼었는데..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20살이 갓 넘은 나이에 어머니마저 잃었던 터라 결혼하면 시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여기며 따뜻하게 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인가. 시집식구들 속에 어울려 살면서 나 혼자 타인인듯한 느낌에 오히려 홀로 사는 것보다 더 큰 외로움을 느꼈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미치도록 그리워 한밤중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죽여 얼마나 울었는지.. 시어머니의 작은 꾸중에도 제풀에 설움에 겨워 몰래 화장실에 숨어들어 훌쩍이며 눈물을 닦았던 것은 몇 번이었고.. 지나온 그 많은 시간 동안 겉으로 내뱉은 말보다 속으로 쌓아온 사연들이 맑은 날 밤하늘의 별 수보다 더 많은 것 같다.


8년이 지난 지금 이제 시누이들도 하나 둘 결혼하여 집을 떠나니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저만큼 밀려나 있고 그 자리에 내가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을 보니 세월은 이렇게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변하게 하는 힘이 있나 보다. 이제 하나 남은 시동생마저 직장 관계로 집을 떠나니 그렇게 만사에 적극적이고 팔팔하시던 어머니가 왠지 갑자기 할 일을 잊은 듯 힘없고 쓸쓸하게 보인다. 혹시나 예전에 나처럼 혼자 타인인듯한 외로움에 젖어 남몰래 눈시울을 적시지나 않으시는지. 나이에 비해 많아 보이는 얼굴의 주름과 일제시대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일하다 실수로 잘렸다는 가운데의 뭉툭한 세 손가락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내 가슴에 어떤 아픔으로 꽉 차 옴은 겨울을 재촉하는 듯 유난스레 불어대는 바람 탓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새 조잘거리던 아이들은 머리를 베개에서 떨어뜨린 채 한잠에 곯아떨어져 있고 어머니도 졸린 듯 눈을 감으신다. 아이들과 할머니, 그 사이에 내가 있다. 내가 지나온 발자취가 여기에 있고 또한 앞으로 내가 가야 할 자리가 여기에 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알몸뚱이로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자기도 모르게 언제 어느 날, 어디선가, 자기가 이루어 온 모든 것들을 내팽개치고 혼자 훌훌 떠나야 하는 것인데, 왜 우리는 이토록 욕심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쌀 한 톨 가져가지 못하는 종말이 옮을 안다면야 차라리 받는 것보다 더 많이 베풂을 삶의 희열로 삼아야 할 텐데...



1984년 부산일보 여성 문예란 투고해서 실린 글이다. 그러니까 36년 전의 글이다. 시간이, 아니 세월이 이렇게 빨리 흘러갔구나.. 묵은 이 글을 보면 그때가 생생하게 내 머리와 가슴에 남아있는데, 아들은 40살을 훌쩍 넘었고 나는 70이 넘었다. 한 남자에게 낚이어 그 집안의 울타리 안에서 새로운 가족이 형성되고 그들에게 봉사하고 나누며 살아왔다. 그것이 여자의 삶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거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렇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 잘 사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지금.. 가끔씩, 아주 가끔씩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까..

사람이 아니라 시대가.. 내 운명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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