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 보지 않은 길

by 칠십 살 김순남

나에게는 생일이 몇 달 빠른 사촌 언니가 있다. 결혼도 6개월 사이로 내가 먼저 했고 언니가 뒤에 했다. 내가 6개월 먼저 아들을 낳았고, 6개월 뒤에 언니는 딸을 낳았다. 둘 다 시집살이를 했다. 그리고, 나는 66살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언니도 시집살이로 신혼살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언니는 딸이 백일 때, 이혼을 했다. 이혼이라고 말할 수도 없겠다. 딸이 백일 즈음에, 친정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외삼촌이 돌아가셨는데, 그때 장례를 치르러 왔다가 시집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대로 친정에 아이와 눌러있었다. 남편은 한 번도 친정으로 와 보지 않았다. 그사이 시집살이가 힘들다고 간간히 말은 했지만, 시집살이가 힘든 것은 언니도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언니의 시집은 우리 집보다 훨씬 잘 살았다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많이 부러웠다.


나는 그 당시 방 두 칸짜리 미닫이 방에서 시어머니, 시동생, 시누들과 함께 살았다. 언니네 집에 처음 놀러 갔을 때 언니 시집은 정원도 있는 커다란 2층 단독주택이었다. 언니는 어쩌다 만나게 될 때, 시어머니 시누이는 힘들게 하지만 시아버님은 잘해 준다고 했다. 나는 결혼 전 시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셔서 안 계셨다.


언니는 아버지 장례로 친정에 올 때, 이미 마음을 정하고 온 듯했다. 그 당시에는 결혼예물로 다이아반지가 유행이었을 때였다. 결혼할 때 다이아 몇 부 짜리를 받느냐로 시집을 잘 간다, 못 간다 했었다. 언니는 결혼 때 예물로 꽤 큰 다이아반지를 받았다. 그렇게 비싼 결혼반지도 모두 빼놓고 왔다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위자료며, 아이 양육비며, 그것이 잘 해결되지 않을 때는 필히 소송까지 가는 지금에 비하면, 순수하고 낭만적인 데가 있는 행위였다. 언니는 시부모의 잔소리, 시누이의 간섭 등, 자신을 부당하게 취급했던 모멸감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시집살이란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갈구했지만, 얹혀살아야 하는 친정은 넉넉하지 않았다. 거기다 늦게 결혼한 오빠와 올케언니 사이에서 눈치도 보아야 했다. 언니는 뒤에서야 친정에서 올케언니와의 사이, 그로 인한 오빠와의 사이도 힘들었다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친정에서 나와 혼자서 어린 딸을 키우며, 많은 일을 가졌고 힘에 겨워했다. 중년이 넘어서 조금씩 안착되어가는 내 생활을 보며, 언니는 가끔씩 “너는 성품이 착해서 많이 참고 열심히 살아서 지금 복 받는 거야. 나는 성격이 못돼서 못 참아내어서, 지금 이렇게 산다.”라고 자조적인 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 착하고 성실한 남편과 시누들, 시어머님, 우리 시가의 친척은 많았고, 다른 집에 비해 유독 유대관계가 돈독했고 크고 작은 일에도 항상 모여서 함께 했다. 화목한 가정은 맞다. 그러나, 사실 그 모든 것은 며느리인 나를 지치게도 했다. 혼자서 사 남매를 거두며 살아야 했던 시어머님의 거친 성품과 잔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 성성했고, 가난한 집의 시집살이에 밖의 일과 안의 일을 보듬어야 했던 시간들, 몸도 마음도 지치고, 끝없이 인내해야만 했던, 피곤했던 그 다난한 과정이, 혼자서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며 살아야 했던 지난한 언니의 그 시간에 비해 결코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나는 오히려 언니를 부러워했다. 나는 이런저런 마음으로 언니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없었으니, 오직 참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오랜 참음은 거친 마음의 병으로 온다. 분노, 미움, 서러움, 고독, 그 많은 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보다, 오히려 언니의 선택이 더 현명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딸이 장성하고 나서는 무척 편안해졌다. 자신의 시간을 보상이나 받듯 활기차게 움직이며 여가 시간을 즐겼다. 자신의 용돈을 위해서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언니에게 더 이상 힘듦은 아니었다. 그동안 언니가 힘들어했던 것은 오로지 경제였다. 아무 준비 없이 마음이 움직이는 데로 했던 자신의 선택 때문에 딸과 두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경제적인 기반이 없었던 거다. 그 문제는 아이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해소되었다.


다 늙어서 언니와 단 둘이 여행을 떠났다. 자연스레 묵은 이야기가 나왔다. 그동안 딸에게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서, 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남겨주지 못해서 항상 미안하고 죄스러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안 했다면 지금 나는 없을지도 몰라.’ 라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정당성도 이야기했다. 물론,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는 가 보지 않은 길을 그리워하고 때로는 부러워한다. 내가 걷는 길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저 길로 갈걸. 저 길이 훨씬 수월했을 텐데라고, 그러나 막상 그 길로 갔을 때, 그 길이 지금의 길보다 더 힘들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지나간 길을 되돌아보며, 내가 선택한 그 순간에 대한 후회로움이 가슴을 칠 때가 있다. 조금 더 참을걸, 그냥 넘어갈 걸, 그랬으면 지금은, 하며 나를 자책하기도 하고 더러는 너 때문이야 하며, 그 순간의 내 선택에 비겁하게 남의 탓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더 한참 지나서 생각하면, 지난 나의 선택은 그 순간에 있어서 최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언니가 첫아이가 겨우 백일이 되었을 때 집을 나왔던 그 엄청난 선택도, 내가 언니와 같은 선택을 못하고 인내하며 살은 내 선택도, 젊은이들이 어렵게 들어간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에 사표를 내는 그 순간의 용기 있는 선택도, 또는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사표를 내야만 했던 그 순간의 선택도, 수십 년을 함께 살아왔던 사람과의 졸혼의 선택도, 그 외 수많은 순간의 선택도, 그 시점에서는 본인이 선택한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


만약, 그 절정의 순간에 조금만 더 참고 가보자 생각하며 앞으로 한 발을 더 내밀었을 때, 거기에 천 길 낭떠러지가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그랬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내면에는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보호본능이 잠재되어 있다. 내가 그 어떤 순간, 그것을 선택했을 때는, 더 나아가면 내가 어찌 될지 모른다는 자신의 보호본능에 신호가 울렸을 것이다. 그 신호를 그 순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지난 어떤 선택도 그 시점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말고 후회하지 말자. 시간은 앞으로 가지 뒤로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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