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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십 살 김순남 Oct 29. 2023

여행은 현재 진행 중

# 새로운 동행자들 





그녀마저 떠나보낸 나는 혼자 살았다. 외로운 듯 외롭지 않은 듯했다. 그 사이 친구라는 이름으로 여러 형태의 동행자가 있기는 했다. 그들은 시간이 날 때 만났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각자가 속해 있는 그룹으로 돌아갔다. 무언가 부족했다. 그런 형태의 동행자 말고, 내가 세상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함께 먹고 함께 자며, 지극히 사랑해 주고 보호해 줬던 그런 동행자, 그런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갈망은 점점 커졌고 갈망은 실행으로 이어졌다. 그에게 믿음이 갔다. 이미 여행을 끝마친 내 오랜 동행자처럼 내가 믿고 의지하고, 내 짐을 맡겨도 될 것 같았다. 짧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앞으로는 긴 여행길이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것 같았다. 작은 빵이라도 같이 나누고 물 한 모금이라도 같이 나누며 긴 여행길을 손을 잡고 잘 걸어갈 것 같았다. 우리는 그런 것을 보고 희망, 또는 꿈이라고 한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 꿈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가를,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새로운 동행인과 여행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좀 더 여행을 하고 나서 또 깨달은 것은 그것이 헛된 희망이나 꿈만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는 맞더라는 것이다.     


꿈이란 것은, 희망이란 것은, 꾸는 그 시간을 즐겁게 하고 가슴을 부풀게 한다. 긴 여행길에 앞으로 나에게 일어날 어떤 일, 만나게 될 어떤 사람에게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현재 진행형인 걸음에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긴 여행길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현상이다.    

 

그에게도, 나와 동행인이 되기 전, 나처럼 세상에 나올 때 통로가 되어주었던 여인이 있었고, 그와 같은 통로로 세상에 나온 동행인들도 있었다. 나는 그와 동행하기로한 순간부터 그들과의 동행도 무언중에 약속되어 버렸다.     


내가 원한 것은 오직 한 동행인, 내 짐을 나누어 들어줄, 나와 함께 손잡고 의지하며 함께 갈 한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지만, 세상은 내 생각대로 만들어진 것도, 진행되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으로의 여행을 시작한 지 24년째 되는 날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그들의 집단과 동행인이 되었다.      


참 쉽지 않은 동행길이었다. 집단이란 것은 크거나 작거나 무서운 형태라는 것을 그때 실감했다. 크든, 작든 집단이란 것은 그들만의 혈맹이란 것으로 뭉쳐져 있어서, 어느 날 합류하게 된 이방인에게,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해서, 차차 견제의 세력으로 인식해 밀어내기도 한다. 그들과 오래 함께 마음을 나누고 정을 나눈 믿음직한 동행인이 데리고 온 또 다른 동행인으로 인해, 자신들의 집단에 생채기나 분열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또는 두 동행인이 뭉쳐 자신들의 오랜 터전에, 또 다른 세력으로 그들을 몰아내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거기에 따른 배타심으로 그들은 은연중에 동행인이 된 나를 알듯 모를듯 밀어내기도 했다.     

 

그 집단은 그들과 피를 나눈 또 다른 혈맹의 집단들과 이어져 있었다. 오래전 인류가 창조되고 자연스럽게 무리 지어 살게 된 부족들처럼 그들은 무슨 일만 있으면 모여서 제사를, 축배를 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묘하게 나는 그들 모두에게 탐색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무리 속에서 견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탐색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외로운 것이었다. 오히려 혼자 걸을 때가 더 행복했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혼자 걸을 때의 편안함, 내 짐을 최소한 내가 지고 걸을 수 있을 만큼만 지고 걷는 것은, 편안하고 자유롭고, 자유로움은 행복의 느낌으로 들어온다. 만약에 내가 여행길에 먹을 것, 입을 것, 예쁘게 보이기 위해 좀 더 많은 장식품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면, 그 여행길은 잠시는 행복하겠지만 결코 긴 여행길을 행복하게 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육신이 그것들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가지고 싶다는,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싶다는 욕망은 편안한 여행을 끝마치게 하는 독이며, 또한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여행을 하다 보면 깨우치게 된다. 유감스러운 것은, 정말 유감스러운 것은 그 깨달음이 너무 늦게 온다는 것이다.       

    

나와 함께 하기로 한 동행인의 첫 번째 동행인이었던, 그녀는 거칠고 강했다. 그녀는 여부족장이었다. 모두가 그녀에게 복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녀도 그녀와 함께 새로운 동행인을 만들었던 남자가 너무 일찍 세상 여행을 끝마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도 나의 첫 동행인처럼 또는 철수의 리더처럼 혼자 그들이 만들어 놓은 어린 동행인들을 먹이고 입히고 데리고 다녀야 했던 여행길에서 억척스럽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 억척스러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것었음을 내가 이해할 때까지는 그녀로부터 숱한 힘듦과 고통과 상처를 받은 후였다.     



어느 한 시간에, 나는 그녀가 나에게 행하는 정신적인 폭력을 견딜 수 없어서 그 집단에서 야밤에 도주라는 행위로 잠시 이탈하기도 했다.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때는 나에게도 내 통로를 이용해 침잠의 세계에서 밝은 세상으로의 여행을 시작한 작은 동행인이 있었다. 그 작은 동행인은 온전히 나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비록 두 사람의 합작품이긴 했지만, 작은 동행인은 내 몸 안에서 오랫동안 둥지를 틀고 있다가 나왔기 때문에 그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 온전히 나에게 속한 것이라 생각했다.     


작은 동물을 포대기에 싸 담은 채, 야밤에 그 집단이 머무는 곳을 탈출했다. 그 시간의 밤공기가 내 온몸으로 부딪쳐온 세상의 느낌, 해방의 느낌을 아직도 기억한다. 오랜 지하동굴에 갇혀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탈옥수처럼 깜깜한 밤조차도 나에게는 환한 낮과 같았다. 그러나 그 느낌은 아주 짧았다. 그 밤이 지나고 나서, 나는 이내 깨달았다. 집단 밖의 세상은 더 무섭다는 것을. 세상은 광활했다. 황야에 혼자 서서 어느 쪽으로 발길을 옮겨야 할지 조차도 갸름할 수 없었다. 그것은 더 큰 절망이며 세상에 대한 공포였다.     


세상의 황야에 서서, 나에게 족쇄를 채운 집단이 그리워졌다. 그 사이 그 구속에 길들여진 것일까? 이반 데니소비치의 수용소의 하루처럼, 족쇄가 채워진 채, 하루 종일 일하고 몇 덩어리의 빵과 물을 받아 먹는 그 달콤한 시간에 맛들여진, 단순한 삶에 길들여진 것일까. 


결국, 나는 다시 그 집단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굳이 변명이라면 나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였다면, 거리의 여인이 되어도 집단으로 돌아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세상의 여행을 책임져 줘야 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갓난 동행인이 있었던 거다.     


도주했다가 다시 잡혀 온 포로가 얼마나 비참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것보다 더 적나라했다. 나는 다시 잡혀 온 포로는 아니었다. 내 발로 다시 집단으로 기어들어와야 했기에, 야밤도주한 내 행위를 무릎 꿇고 싹싹 빌어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렇게 다시 집단으로 들어온 나는, 아이로니컬 하게도 야밤도주한 이전보다 사는 게 조금은 더 편했다. 혼자 쓴웃음을 여러 번 지었다. 그 이유는 나에게 꿈, 희망이라는 단어가 없어졌고, 포기라는 덩어리가 내 마음 한가운데 자리해 버렸기 때문이다. 


새삼 꿈, 희망이란 단어만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천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포기라는 절망적인 단어도 세상을 살아가는 힘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보면 꿈, 희망이란 단어보다 포기란 단어가 긴 여행길에 더 유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쉽게 말하면 그냥 걷는 거다. 언제 끝날지 나도 알 수 없는 긴 여행길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거다. 걷다가 힘들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걷는 거다. 걷다 보면 언젠가 끝날 길이다. 걸으면서 그냥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본다. 하늘이 푸르구나, 오늘은 구름이 많구나. 구름이 하얀 이불솜처럼 곱다. 저 구름에 누우면 편안하게 잠이 잘 오겠구나, 비가 오면  비가 오는구나.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니 시원하다. 새삼 물을 머금은 길바닥의 잡초들이 그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제 나름의 초라한 향기를 뿜어내는데 그 냄새가 황홀하다. 황홀한 향기에 마취되어 아무 생각 없이 걷기도 한다. 걸을 만하다. 이렇듯, 마음속에, 내 여행에 대하여, 나의 무한한 자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무심히 걸으며 여행을 하는 거다.      

포기라는 단어가 비참한 듯 느껴져도 이렇듯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 살다 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에 처하게도 되는데, 그럴 때 어떻게든 해 보고자 용을 쓰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 옥죄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무책이 상책이다>라는, 속된 격언을 떠 올린다. 속된 격언이지만 충분히 조언이 되는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운명이란 것이 나를 때리고 가는데 인간이란 나약한 속성으로 맞설 수 없다. 누군가가 그랬단다.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그 기세에 운명이 주춤거리더니 앞에서 사라지더란다. 내가 운명을 물리쳤다 의기양양해서 걸어가는데 뭔가 발이 잘 안 떨어지더란다.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힘이 들어서 왜 그런가 발을 내려다보니, 운명이란 놈이 치맛자락에 질질 매달려 오더란다. 참 섬뜩한 말이다. 그러니 그 무서운 운명이란 놈이 나를 옭아매었을 때는 무책이 상책이다라며 배짱을 내밀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어 보는 거다. 그러다 보면 운명이란 놈이 시시해서 제풀에 나가떨어질 때가 있을 터이니. 


그리스란 곳에 ‘테바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있었다. 그는 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신탁 때문에 세상에 나오자마자 산속에 버려졌다. 하지만 목동에게 발견되어 요행히 살아남았고 이웃나라의 왕자로 성장하여 결국 신탁의 예언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테바이의 왕위에 올라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렇듯, 여러 동행인을 만나고 또 헤어지고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연, 사건, 사고는 때때로 내 영역 밖의 것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족장이나 그들의 혈맹으로 맺어진 동행인들 사이에서 때로는 무시를 당해도, 때로는 폭력을 당해도 받아들이며 그냥 걷는 거다. 그 폭력을 피해 야반도주해 본 경험이 있는 나로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집단에 속해 있는 것이, 나보다는 내 어린 동행인에게 절대적인 보호막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생이란 단어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꼭 ‘희생’뿐이겠는가? 어린 동행인의 성장을 보는 것은 나에게는 아름다운 나무가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보다 열 배는 더 큰 희열감을 준다. 그러니 희생이란 말은 맞지 않는다. 희생이 주는 피로감과 희열이 주는 행복감을 비율로 밝히자면 후자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현재의 걸음에 집중하며 걷다 보면, 언제 끝날지 모를 지난한 길이 그나마 걸을만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집단에 소속되어 걸으면서 설령 견제당하고 시기 당하고, 탐색 당하고 때로는 날카로운 언어의 폭력으로 괴롭힘을 당해도, 다른 집단과의 마찰이 생길 때면 그들은 절대적으로 나의 편으로 돌아서서 상대편과 맞서주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굉장히 강하고 크다. 그것은 그들이 내편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광활한 세상에서 내 편이 있다는 것은 의지이며 위로다. 우리는 옛 구석기 시대 때 형성된 부족과 같은 마음으로 어느 사이 조금씩 부드러운 유대관계를 형성해 갔다.       

   

함께 걷는 동행인이 아프거나 괴로우면 모두 힘들어진다. 함께 여행길에 나선 사람이 길을 걷다 다치거나 지쳐버린다면 나머지 사람들이 미우나 고우나 그 사람을 부축해 줘야 하며, 그의 짐을 나누어 들어줘야만 한다. 그러니 결론은, 모두가 건강해서 잘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며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편안한 여행을 희망한다면 함께 하는 동행인의 여행이 즐겁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지쳐서 주저앉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시로 동행인의 건강과 발걸음을 탐색하고 거들어주게 되어있다. 때로는 내 입에 들어가야 할 것도 지친 동행인들에게 양보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하여 때로는 가까이 붙어서, 때로는 손을 맞잡기도 하고, 때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로 거리를 두어 걷기도 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동행인이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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