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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십 살 김순남 Nov 05. 2023

여행은 현재 진행 중

절대자

한 부족의 일원으로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게 된 것은 내 어린 동맹인이 태어나고 자라면서였다. 이어서 또 다른 동행인이 세상에 나왔고 두 어린 동행인은 혈맹의 형태로 이 집단에 완전히 소속되어 버렸다. 새로운 따끈따끈한 맑은 피가 그 집단을 확장시켰고 단단한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나는 단순한 나만의 세상에 갇혀 인생은 외롭고나, 고독하고나 라며 읖조려지지 않게 되었다. 고독을 논하기에는 일단 우리 집단에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먹어야 산다. 엄마의 자궁을 통해 나온, 이상한 기형의 몸을 지닌, 개구리 같은 형상의 형태로, 눈도 뜨지 못하는 동물 같은 어린 짐승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엄마의 젖을 빠는 것이다. 어린 짐승 같은 것이 눈도 뜨지 못한 채 젖꼭지에 입술이 대어지면 반사적으로 빨아재끼는데 그 힘이 얼마나 센지 모른다. 그 작은 입에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퉁퉁 부어 있는 큰 젖통이 순식간에 납작해지는 경험을 대부분의 어린 동행인을 거느리고 있는 여인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살고자 하는 짐승의 원초적 본능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소름끼치게 느껴지기도 하면서 내 몸이 누군가의 생명줄이 된다는 사명감과 보람, 뿌듯함은 체험해 보지 않은 이에게는 온전히 그 느낌을 설명할 수 없다.   

  

먹는 것이 인간의 제일 기본적인 첫째 소명이다. 먹는 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세상에 범죄가 생기게 된다. 무엇으로든, 내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도 일단 내 배를 채워야 한다. 그게 사는 것이다. 갓난 동행인은 어릴 때는 엄마의 젖으로 만족하지만 자랄수록 다른 더 큰 무엇이, 많이 필요해 진다.      


한 혈맹의 집단을 이루는 자를 여기서는 ‘가장’이라 한다. 우리 집단에서의 가장은 남자, 즉, 내가 선택한 동행인이었다. 그러나 명칭만 그럴 뿐, 아직까지 실질적인 우리 집의 족장은 그의 첫 번째 동행인 여인이었다. 우리의 가장은 혈맹으로 이어진 한 집단을 배불리 먹일 만큼의 능력이 없었다. 그러니 나에게 있어서 여부족장은 내가 복종해야만 할 위인일 수밖에 없었다.     


족장이나 그들의 혈맹으로 맺어진 동행인들 사이에서 때로는 무시를 당해도, 때로는 폭력을 당해도 받아들이며 그냥 걷는 거다. 그 폭력을 피해 야반도주해 본 경험이 있는 나로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집단에 속해 있는 것이, 나보다는 내 어린 동행인에게 절대적인 보호막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생이란 단어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꼭 ‘희생’뿐이겠는가? 어린 동행인의 성장을 보는 것은 나에게 어떤 아름다운 꽃이 자라고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는 과정보다 열 배는 더 큰 희열감을 준다. 그러니 희생이란 말은 맞지 않는다. 희생이 주는 피로감과 희열이 주는 행복감을 비율로 밝히자면 후자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현재의 걸음에 집중하며 걷다 보면, 언제 끝날지 모를 지난한 길이 그나마 걸을만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집단에 소속되어 걸으면서 설령 견제당하고 시기 당하고, 탐색 당하고 때로는 날카로운 언어의 폭력으로 괴롭힘을 당해도, 다른 집단과의 마찰이 생길 때면 그들은 절대적으로 나의 편으로 돌아서서 상대편과 맞서주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굉장히 강하고 크다. 그것은 그들이 내편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광활한 세상에서 내 편이 있다는 것은 의지이며 위로다. 우리는 옛 구석기 시대 때 형성된 부족과 같은 마음으로 어느 사이 조금씩 부드러운 유대관계를 형성해 갔다.     


함께 걷는 동행인이 아프거나 괴로우면 모두 힘들어진다. 함께 여행길에 나선 사람이 길을 걷다 다치거나 지쳐버린다면 나머지 사람들이 미우나 고우나 그 사람을 부축해 줘야 하며, 그의 짐을 나누어 들어줘야만 한다. 그러니 결론은, 모두가 건강해서 잘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며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편안한 여행을 희망한다면 함께 하는 동행인의 여행이 즐겁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지쳐서 주저앉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시로 동행인의 건강과 발걸음을 탐색하고 거들어주게 되어있다. 때로는 내 입에 들어가야 할 것도 지친 동행인들에게 양보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하여 때로는 가까이 붙어서, 때로는 손을 맞잡기도 하고, 때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로 거리를 두어 걷기도 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동행인이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한다.

                    



두 번째로 내 통로로 세상 여행을 나온 그 동행인은 바람만 불면 훅 날라갈 것처럼 유난히 작고 여렸다. 그 여린 동행인이 우리 집단에 속해 여행을 시작한지 5년이 되던 째였다.      


쌩쌩 달리던 오토바이가 그녀를 치고 갔다. 어린 몽둥이는 그 기세에 공중으로 날려 저만치 차갑고 딱딱한 시멘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의 시간이 지나고 어린 여행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천히 일어났다.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집으로 왔다. 다음날 아침, 여느날처럼 우유를 한 잔 받아 마시더니 바로 토해 내었다. 계시였다. 참으로 그것은 계시였다. 전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멘 바닥에서 일어난 아이를 인근 작은 병원으로 데리고 갔을 때, 아이를 살펴보던 늙은 침술사가 말했다. 공백에 뭔가를 먹고 토하면 바로 큰 병원으로 데리고 가라고.     


늙은 침술사의 말이 그대로 일어났다. 서둘러 큰 병원으로 갔다, 아이의 머리를 박박 깍이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사진을 찍어대었다, 출력되어 나온 사진을 보던 키가 큰 침술사가 벌떡 일어나 나와서 아이를 안고 수술실로 뛰어 들어갔다. 일초가 급했다는 뜻이다. 모르는 남자의 품에 안겨 가면서 아이는 나를 찾았다. 뒤따라 가며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그 시간, 아이의 뇌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이의 눈동자는 분명 나를 보는 듯 했는데 아무 색도 아무 눈빛도 없었다.      


아이가 수술실에 들어가 수술대에 누워 있을 때에, 작은 침술사가 나에게로 와 종이를 내밀었다. 아이의 수술에 대해서 어떤 일이 생겨도 자신들은 책임을 질 수 없으니, 그것을 인정하겠느냐는 내용이다. 아이가 세상여행을 오기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의미였고, 그랬을 때 소란피우지 않고 잘 보내주겠느냐는 의미의 글이었다.      


나는 서명이란 것을 했다. 그 시점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아이가 세상여행을 시작할 때 그 많은 통로 중에 왜 나의 좁은 통로를 선택했는지도 모르니, 그 아이가 세상 여행을 일찍 마치고 돌아가겠다한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의지가 그 작은 동행인의 의지가 아니란 것만은 알았다. 그러나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젊은 침술사가 내민 종이에 서명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그에게로 갔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갔지만 나는 뻔뻔하게 그에게 대들었다. 그에게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뻔한 인사말을 하기에는 그 순간이 너무 화급했고 막막했다. 내 생각뿐이었다. 온통 내 어린 동행자의 생각뿐이었다.      


그에게 대들었다. 당신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우주 전체에 존재한다고 알고 있다. 우주 전체를 주관하는 자라고 알고 있다. 당신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다. 나는 진리며 생명이다.’ 가난하게 온전히 가난한 마음으로 여행하는 자에게는 항상 빵과 물을 줄 것이니 걱정 말고 여행하라고 했다. 세상 여행길에서 동행인에게 선하게 하는 사람은 선함으로 보상받을 거라 했다. 그래서 당신을 믿은 거다. 내 어린 동행인이 무얼 잘못했느냐? 아직 세상 여행을 5년밖에 하지 않은 그 꼬맹이의 마음이 가난하지 않아서인가? 마음이 가난하고 부자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꼬맹이이다. 이 세상으로 여행을 하도록 허락한 것은 당신 아니냐? 그 어린 동행인이 나의 통로를 이용해 세상에 나오게 한 것도 당신 아니었느냐?  그렇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져라. 혹시라도 내 죄를 묻고 싶어 내 어린 동행인을 이용했다면 그것은 오류다. 내가 지은 죄는 내가 책임진다. 나에게 책임을 묻고 그 아이를 살려내라.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그에게, 우주를 관장한다는 절대자에게 주먹질하고 대들고 악다구니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악다구니를 해대며 지쳐서 정신을 잃었다.     


그때, 나는 꿈이란 것을 꾸었다. 아스달 연대기에 나오는 그 꿈이었다. 무언가를 예시하는, 꿈구는 자, 그것은 단순히 희망을 의미하는 꿈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주는 예시였다. 그에게 악다구니를 하며 대들어 지쳐 스러진 나에게 그는 천천히 다가와 길가 우물에서 한 족자의 물을 퍼서 나에게 주었다.     


그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홍건히 땀에 젖었다. 정신을 차리고 문득, 수술대에 누워있는 내 어린 동행인이 어찌 되었나 궁금해 서둘러 일어났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현상이 내 몸에 일어났다. 어떤 절박함이, 이곳에 들어설 때의 그 절박함이 없어진 듯했다. 내 어린 동행인의 여행길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그 어린 동행의 세상 여행에 대해서, 여행을 계속하든, 돌아가든, 그 절대적인 순간을 내가 결정 할 수 없다는 것, 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오로지 절대자의 손에 의해서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그에게 빌고, 대들고, 악다구니를 해 댔다. 그것만이 오로지 그 순간 내 어린 동행인을 위해 할 수 있는게 전부였다. 그 전부를 했고, 이제는 그 어린 동행자에 대한 결정권은 내 손에서 떠났다. 나는 절대자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그가 내릴 결정만을 기다리는 게 지금으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 순간, 나의 모든 것은 정지되었다. 내 의지, 희망 그런것들이 모두 내 마음에서 빠져나갔다. 그때까지 쥐고 있던 내 욕심, 꿈, 희망 같은 것을 놓았다. 내 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절대적인 깨달음은 이상하게 포승줄로 꼭꼭 묶여 있던 마음을 풀어주었다.


절대자는 내 처절한 울부짖음을 들었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어린 동행인은 어직도 내 동행인으로 여행은 현재 진행 중이다.    


 그때부터 절대자는 나의 절대적인 동행자가 되어주었다. 그는 내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내 여행길에서 소소하게 모든 것을 다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외면하기도 하는 듯 느껴질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내 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냥 그가 나설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절대자는 아무 때나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표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절대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믿음이 간다. 절대자, 그는 내 편이며 나는 그를 믿으며, 그가 언젠가 나에게 무엇이든 명하면 받아들일 수 있다. 세상 여행길에 절대적인 위대한 인물이 함께 한다는 믿음은 나를 강하게 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날 모르고, 나의 진심된 마음을 오해하고 외면한다 해도, 그는 모든 것을 꿰뚫고 이해하고 받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죄와 벌을 다룰 때 인간이 정한 법의 기준과는 다를 것이다.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치섬 신부님의 말씀같이 그 분은 행위로써 가 아니라 그 의도를 보아 우리의 생애를 심판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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