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그때 나는 다섯 살 정도였을까. 검지 손가락이 엄청 아팠고 퉁퉁 부어올랐었다. 퇴근하고 돌아와 내 손가락을 본 아빠는 나를 둘러업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데려갔다. 생인손이라며 의사 선생님은 손가락을 째서 고름을 빼야 한다고 했단다. 겁이 많은 다섯 살의 막내딸, 주사만 봐도 울어버리고 마는 막내딸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아빠는 나를 번쩍 안아 침대에 누이고 온 몸으로 웅직이지 못하게 나를 꽉 붙잡았다. 얼마나 울었던지, 얼마나 발버둥을 치려고 애썼던지 머리는 금세 땀으로 젖었고,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치료 과정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아빠는 나의 고개를 의사 선생님의 반대 방향으로 줄곧 누르고 있었는데, 땀에 젖은 머리가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온 바람에 꾀나 시원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그때도 지금과 같은 가을, 9월이나 10월 즈음이었던 것 같다. 악을 쓰다 지쳐 눈물만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바라본 창밖의 새까만 밤하늘과 반짝이는 불빛들이 쪼끄만 어린아이 눈에 어쩌면 그렇게 예쁘고 평화로워 보이던지, 가는 신음 소리만 내며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던 그 장면이 아직도 내 기억에는 선명하다.
내 손가락에는 언니, 오빠가 미처 경험해 보지 못한 대단한 일을 내가 하고 온 것처럼 으스댈 수 있는 붕대가 감겼다. 동네 또래 친구들에게 감히 너희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을 내가 하고 왔다며 자랑하듯 보여줄 수 있는 두툼한 손가락 붕대를 감고 다시 아빠 등에 업혀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 다른 손에는 평소에는 갖기 힘든 종합과자 선물 세트가 들려있었다. 안쓰러웠을 어린 딸에게 사준 그 특별 선물이 얼마나 좋았던지, 다섯 살 인생에 플라스틱 빨간 산타할아버지 장화 안에 과자가 넘치게 들어있는 종합 선물세트는 너무 달콤한 행복이었다. 행여 놓치기라도 할까 손에 꼭 쥐고 기댄 아빠의 등에서는 아빠의 냄새가 났고, 그 아빠의 등은 너무 넓었고, 단단하고 든든했다.
그렇게 언제까지고 나의 버팀목이 되어 줄 것 같았던 아빠를 나는 추석 연휴 끝자락에 잃었다. 우린 작별인사를 서로 하지 못했는데도, 아빠는 나를 떠났고 나는 아빠를 보내고 말았다. 그리운 아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지도,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지도 9년이 지나고 있다. 해마다 추석이 다가오면 보름달처럼 꽉 찬 아빠 생각이 전보다 더 많이 난다.
아빠는 75세, 늦여름 더위가 지독하던 9월 초에 쓰러지셨다. 삼 남매의 설득 끝에 막내딸이 사는 곳 가까이로 이사를 온 지 2년이 지났던 그 해의 9월, 아빠가 쓰러지던 그 주에 나는 하필이면 이래저래 바빠서 거의 일주일이 넘어가도록 아빠, 엄마를 뵈러 가지 못했다.
평소와는 달리 그 중압감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짓누르고 있어서 ' 내일은 꼭 가야지, 내일은 꼭 가야겠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날 아빠가 쓰러지셨다.
아빠가 타고 온 엠블런스가 응급실에 도착하니 의료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의식이 없으셔서 입은 옷을 가위로 잘라내야 했고, 곧이어 여러 가지 검사가 진행되었다.
"아빠, 나야. 아빠, 들려? 아빠, 눈 떠 봐.
아빠... 아빠? 괜찮을 거야. 아빠."
본 적 없는 낯선 아빠의 모습에 나는 울었다. 그런데, 아빠도 울고 계셨다. 의식도 없으셨지만, 내가 아빠의 얼굴에 대고 계속 얘기를 하자 아빠의 두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흘러나왔다. 보통 의식 없는 환자들이 흘리는 눈물은 다들 의미 없는 눈물이라고 하던데, 아빠는 분명 울고 계셨다. 아빠는 나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아빠는 곧 수술실로 들어갔다. 길고 긴 시간의 수술 후 만난 아빠는 마음이 너무 아프게도 많이 떨고 계셨다. 기온이 낮은 수술실에서 장시간 동안 있다 보니 너무 추우셨나 보다. 중환자실에 와서도 아빠는 많이도, 너무나 많이도 떨고 계셨다. 추위 많이 타는 우리 아빠, 얼마나 춥고, 아프고, 힘드셨을까. 그렇게 이별을 준비하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하루 두 번, 15분의 짧은 시간만 허락되는 중환자실 면회를 엄마를 모시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갔다. 다음 날 만난 아빠는 더 이상 떨지 않으셨고, 얼굴의 부기도 많이 가라앉았다. 며칠이 지나자 얼굴 혈색은 다시 발갛게 돌아왔고,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내 손을 잡아 줄 것만 같아서, 나는 곧 아빠가 깨어나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아빠, 아빠? 내 얘기 듣고 있지? 다 듣고 있는 거지? 아요, 우리 아빠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까까머리 고등학생 같다. 이렇게 해도 너무 멋있네. 아빠 이제 얼른 일어나. 수술도 잘 됐다는데, 얼른 일어나. 응? 아빠. 조금 더 있으면 추석이잖아. 우리 얼른 집에 가자. "
수술 때문에 머리카락을 전체 밀어버린 아빠의 머리에서 시간이 지나자 파릇파릇 잔디가 돋아나듯 다시 머리카락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아빠는 결국 의식을 찾지 못하셨다. 중환자실에서 보름을 지내는 동안, 아빠는 단 한 번도 내 손을 다시 잡아주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면 의식이 돌아올 거라 믿었는데, 의식 없이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다른 곳들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제 이별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매일 두 번, 면회시간마다 아빠와 대화를 나눴다. 대답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분명 막내딸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었을 거라 나는 믿는다. 중환자실 창밖에 가을 햇살이 쏟아지던 날에도, 무섭게 장대비가 내리던 날에도 나는 그 창문 밖의 풍경을 아빠와 곧 함께 느낄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의사 선생님은 야속하게도 감정선의 큰 변화가 없이 보내드려야 할 때가 가까이 온 것 같다고 했다.
그날, 나는 아빠의 품에 머리를 묻고 또 울었다.
" 아빠 사랑해. 아빠, 너무 고마워. 그리고... 너무 미안해, 아빠"
아빠는 또 울고 계셨다. 의미 없이 떠지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두 눈을 거즈로 덮어 놓았었는데 , 그 거즈 아래로 또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빠, 듣고 있구나. 아빠, 듣고 있는 거지? 내가 너무 미안해 아빠. 정말 미안해 아빠"
아빠가 쓰러지던 그날 내가 아빠, 엄마를 뵈러 갔더라면 혹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늘 마음이 힘들었다. 내가 그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일찍 부모님을 뵈러 갔었더라면, 아빠의 이상 징후를 일찍 알아채고 바로 조치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이 가슴에 너무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빠가 우리 곁을 떠나간 날은 추석 다음날 새벽이었다. 아빠가 위중하셔서, 엄마와 우리 삼 남매의 가족들은 모두 우리 집에서 모여서 추석을 보내기로 했다. 저녁 면회를 마치고 돌아와 함께 저녁을 먹고 다 치우고 나니 몸이 많이 고되었다. 그날은 유독 마음이 많이 눌리기도 했고, 몸도 너무 지쳐서 침대에 빨려 들어가듯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다. 핸드폰 울림이 얼마나 무섭던지, 칼날 같이 날카롭고 몸 전체를 뒤흔들듯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온몸이 벌벌 떨렸다. 도저히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남편에게 전화기를 건넸다. 아빠가 하늘나라에 가실 것 같다고, 빨리 오라고 한다고 했다.
아빠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고, 얼마 후 남편이 조심스레 얘기를 한다. 새벽에 전화가 울리기 바로 전 신비한 꿈을 꾸었다고 했다. 우리가 잠든 방문 쪽에서 아주 환한 빛이 비치며 우리 침대 쪽으로 다가왔는데, 그 빛 속에 아빠가 서있으셨다고 한다. 그리곤, 잠든 나를 내려보며 내 이름을 안타깝게 나지막이 몇 번을 부르셨다고 했다. 아빠는 떠나가기 전, 그렇게 나를 찾아오셨다. 남편에게 막내딸을 잘 부탁한다고 하는 것처럼 찾아오셔서 마지막으로 그 사이 많이 파리해졌을 막내딸을 안쓰럽게 바라보셨다 한다.
처음 겪는 이별이었다. 한 번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경험이 없는 우리는 모두가 너무 힘들고 아팠고, 나는 아이가 둘이나 있는 어른이었지만, 낯선 곳에서 아빠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마음이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세월이 이렇게 덧없이 빠를 수가 있을까.
" 네 나이가 마흔이 되어가니 아빠 나이가 이렇게 되지. "
" 우리 막내 오늘은 어땠어? 오늘 네가 행복하면 됐어. 네가 행복하면 아빠도 행복해."
아빠가 떠나시기 전에 아빠랑 통화를 할 때면 유독 나에게 많이 하시던 말씀이다. '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네가 슬프면 아빠도 슬퍼...'
아빠의 목소리에는 늘 힘이 넘쳤고, 막내딸 이름을 부를 때면 사랑이 느껴졌었다. 삼 남매 중 유일하게 아빠랑 술친구가 되어주었던 막내딸에게 시원한 맥주 캔을 건네며, 명절 때마다 함께 한잔하자고 애교 있게 조르시곤 했는데, 이제 아빠와 잔을 부딪칠 수도 없고, 맛있는 안주를 만들어 드릴 수도 없다.
그렇게 아빠를 만나지 못하고 9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어제 헤어진 듯 내 기억 속에는 아빠의 모습이 너무 선명하고, 그 기억 속의 아빠는 여전히 강단이 있으시고,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넘치신다.
얼마 전 어딘가에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10년 전으로 되돌아 가거나, 10억을 받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내 인생이 잔잔하게 아름다웠다고 생각하고 있고, 과거에 못다 한 큰 후회나 미련이 없어서인지 10년 전으로 굳이 되돌아 가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어떻게 대답을 할까 궁금해서 그날 저녁 퇴근 후 돌아온 남편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 나도 굳이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데, 10년 전이면 장인어른이 살아계셨을 때네. 그럼 10년 전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
10년 전으로 거슬러 가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딱 한 번만이라도, 단 한번 만이라도 예전처럼 아빠와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화 찬스를 한 번만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참 많이도 생각했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너무 그리우니까, 너무 보고 싶으니까...
그때 나는 ' 이미 9년이 지나서 아빠만큼은 아니지만, 막내딸도 나이를 켜켜이 먹고 있고, 그때 꼬맹이들이었던 아빠가 영국 신사들이라 불렀던 아빠의 손자들은 이미 대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그 사이 엄마는 외로우셨고, 아프기도 하셨지만 이제 많이 씩씩해지셨다고. 우리는 한국을 떠나 아직도 상해에서 살고 있다며... ' 끝도 없이 밀린 얘기들을 끝도 없이 하고 싶다. 하늘에서 이미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더라도, 목소리로 전해 듣는 막내딸의 이야기는 얼마나 반가울까. 아빠와 나는 어쩌면 서로 우느라 말을 못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는 꼭 아빠께 묻고 싶다.
" 아빠, 거기서 행복해? 아빠, 오늘은 어땠어? 행복했어?
아빠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아빠가 슬프면 나도 슬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