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uren Aug 10. 2019

맨땅에 헤딩, 이런 거였니?






내 허락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인생

2012년 4월 말 나는 상해로 왔다. 처음 남편의 해외 주재원 이야기가 오갈 때 나는 중국만은 아니길 바랬었다.  중국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고, 중국어는 더 말할 것도  없었으며, 그때까지 중국에 대해 품고 있던 내 머릿속의 이미지들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었다. 그런데, 인생은 늘 생각한 대로, 원하는 대로 흘러가 주질 않는다.

한국에서 한참 꽃을 하고 있을 때 , 갑작스럽게 내 인생의 기둥 같았던 사랑하는 아빠가 돌아가셨다. 아빠의 사랑을 많이도 받았던 막내딸이었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두렵고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슬픔에 눌려있던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어  유방암 진단을 받으셨다. 어두운 터널을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가는 것 같았던  엄마의 긴 항암 치료 기간 동안 나의 하루하루는 늘 엄마와 함께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많이 힘들었다. 슬픔과 아픔, 육체적인 고단함의 지루한 싸움이 자주 내 속에서 일어나 나는 아무도 없을 때 주방 냉장고에 기대앉아 숨죽여 울었다. 


길고 끝이 없어 보이는 터널 속에서도 쉬지 않고 걷다 보면 저 멀리서 한 줌의 눈부신 빛이 강렬히 쏟아져 들어오는 순간을 마주 하게 된다. 엄마의 항암치료가 끝났고, 반짝 반짝이던  엄마의 머리에서 다시 아기처럼 부드럽고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했다.  안식년을 맞이 한 것처럼 나는 걱정의 무게를 조금 덜어놓고 상해로 왔다. 엄마는 막내딸이 떠난 곳에서,  나는 친구 한 명 없는 상해에서 새로운 시작을 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낯설었다. 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은 곳 , 오고 싶지 않았던 곳,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인사말 외에는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곳.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꽃을 다시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다시 나는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이곳에 발을 디딘 참이었다.


하지만, 배운 게 도둑 질뿐이라고 꽃이 그리웠다. 무작정 노트북을 켜고  사전에서 찾은 단어 花市场 (꽃시장)을 검색했다.  여전히 나의 중국어는 형편없었지만 용감히 택시를 탔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미리 발음 연습을 하고 타도 너무나 어려운 것.  어눌한 사성이 섞인 내 중국어는  굳이 안 들어봐도 엉망이었을 테고,  용케 기사님이 알아듣는다 해도 자꾸 말을 걸면 대답을 할 수 없는 나는 진땀이 흘렀다. 혼자 타는 택시는 늘 무서웠다. 내가 상상하던 중국은 너무 험한 곳이었으니까. 그래서 두려움은 더 컸고, 자꾸 나를 이상한 데로 데려갈 것만 같아서 택시 뒷좌석 문에 바짝 붙어 앉아있었다. 



天哪(티앤나) ,세상에!


그때만 해도 중국은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여름이면 민소매 러닝셔츠 차림의 아저씨들이 셔츠 끝을 또르륵 말아 올려 볼록 튀어나온  배를 내놓고 다니질 않나, 아예 웃통을 벗고 거리를 활보하지 않나, 잠옷을 입고 아무렇지 않게 마트에서 장을 보기도 했다. 天哪! 사람이 뻔히 다니는 길임에도 뒤를 돌아볼 일을 보는 남자들도 보였고,  심지어 사람들이 복작복작한 기차역 실내 한가운데서 신문지를 펴고 쭈그리고 앉아 아이에게 큰 일을 보게 하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상해는 정말 놀라운 발전을 했다.


한국에서는 늘 어두운 새벽 강변북로를 달려 강남 고속터미널 경부선 3층 꽃시장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었다.  꽃시장에 들어설 때마다 훅 하고 오감으로 느껴질 것 같던 그 꽃향기는 잊을 수가 없다.  몸으로 기억하는 그 꽃내음을 떠올리며 상해의 꽃시장에 내리고 보니  막연히 생각한 것보다 많이 지저분했고, 조화가 많았던 건물 2-3층은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고,  길이 미로 같아 무서웠다. 

게다가 그때만 해도 중국 꽃시장에서는 새와 물고기를 같이 팔았다. 그래서 대부분 花市场 (화시장)이 아니고 花鸟市场(화조 시장)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뿐인가. 시장 안 좁은 길 사이로는 거북이도 팔고, 자라도 팔고, 토끼와 햄스터는 물론 가을이 오면  쩌렁쩌렁 울어대는 귀뚜라미도 함께 걸어두고 팔았다. 귀뚜라미들이 어찌나 큰 소리로 우는지 조그만 우리를 뚫고 나올까 봐 가까이 지날 때면 잰걸음으로 도망치듯 걸어야 했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  중국에서 처음 찾아간 꽃시장은  당시 상해 내에서 가장 큰 꽃시장이었고, 중국에서 꽃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도매시장이었다.  그 후 나는 그곳 상인들에게 중국어 잘 못하는 한국 플로리스트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중국어 잘 못하는 한국인 플로리스트는  꽃을 보니 힘이 났고 다시 가슴이 떨렸다.  처음 시작은 일주일에 한 번 4명의 수업,  그리곤 4명이 10명이 되었고, 10명은 다시 20명, 30명이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던 수업은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네 번 그리고 매일 수업으로 늘어났다.  그 사이 중국인들도 큰 관심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제대로 된 중국어 한마디 못하고 팔로워 0명에서 중국인 지인 한 명도 없이 시작한 웨이보는 팔로워가 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처음엔 다 그런 거지?


규모가 조금씩 커지는 사이 행복하기도 했지만  많이 힘들었다. 한때 나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아이들의 학습 매니저 겸 학원 픽업 전문 드라이버였는데, 아이들의 숙제조차 봐줄 여유가 없었다.  매일 꽃 속에 파묻혀 지내야 했고, 꽃 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일이 너무 많고 고돼서 몸은 늘 아팠다.  학습 매니저 역할을  다시 그만둔 엄마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날이 많았지만, 아이들의 인생에 전부를 걸지 않기로 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바르고 행복한 아이들로 잘 자라주었고, 인생의 가장 좋은 친구인 남편은 언제나 내가 넘어지지 않게 늘 당신이 최고다, 당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며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럼에도 낯선 땅에서 나처럼 맨땅에 헤딩을 하다 보면 사실 몸이 힘든 건 견딜 수 있어도  마음이 다칠 때가 제일 힘들다.  아직 경험치도 많지 않은데,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사람에 대해 회의감이 들 때가 참 많았다.  가장 나를 잘 이해하고 감싸줄 것 같았던 사람들은 나를 더 아프게도 했고,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더 큰 슬픔을 안겨주기도 했다.  또, 언어와 문화와 생각이 다른 중국인들은 그 시절만 해도 참 무례한 사람도 많았고, 예의나 매너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아서 수업이 끝나고 모두 돌아간 텅 빈 작업실에 앉아서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한 날도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사람은 누구나 경험치가 쌓여가면서 어른이 되어간다.  나의 유리 같았던 마음도 많이 단단해졌다.  처음 나는 자갈밭을 맨발로 걷고 있어서 많이 아팠다. 날카로운 돌멩이에 베여 피가 나기도 했고,  울퉁불퉁한 길을 계속 걷다 보니 멍이 들고, 생채기가 채 아물지 않은 곳을 또 다치기도 했다. 그렇게 걸어오는 동안 내 발에도 굳은살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자갈밭이었던 곳은 어느새 하나, 둘 포장도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인생이 어디 만만하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어려운 상대여서 나는 여전히 길 잃은 어린아이 같을 때가 있지만, 그 또한 지나갈 것이고  곳곳에 흉터가 생긴 발도 이제와 돌아보니 내 인생의 훈장같이 반짝반짝 아름답게만 보인다.














작가의 이전글 시들게 마련인데, 왜 꽃을 하시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