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수도권 일주일 여름 재택근무 기록
일주일 동안 일기는 무슨. 금방 시간이 모두 지나가서 이미 서울에 있는 내 방에 앉아서 일기를 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 다녀왔다. 으레 다니던 여행과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무채색만 가득한 옷장에 쨍하게 예쁜 녹색 옷을 하나 걸어둔 기분이다. 잘 보관해서 오래도록 간직할 기억으로 남겨야겠다. 친구와 함께 떠날 생각이었는데 친구가 급히 사정이 생겨 먼저 혼자 가게 되었다. 나는 사실 혼자 여행을 꽤 자주 다니는 편이었다. 두달 내도록 혼자 여행을 다녀온 적도 있으니 말이다. 리모트를 하러 떠난 강릉은 기차로 3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인데 혼자 가려니 덜컥 겁이 났다. 다른 친구들에게 말하니 국내 여행인데 무얼 그리 겁내냐는 말에 갑자기 얼음물 한 잔을 마신 기분이 들었다. 흔히들 하는 유리병에 갇힌 벼룩의 비유가 있지 않은가?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집에서 재택근무를 오래 하면서 내 영역과 경계가 자연스럽게 줄어 들어있었는데 체감하지 못했었나 보다. 별일이야 있겠나 하는 마음으로 먼저 도착했다. 강릉에서 스친 사람들 중에서 친절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첫날 택시 기사님도 있는 동안 즐겁기만 하라고 하셨으니까.
첫날은 거짓말처럼 맑았다. 운이 좋았달까 머무는 동안 주말에는 맑았다. 바다도 바다지만 주변에 논밭도 좋았다. 고작 몇 달을 밭을 들여다 보았다지만 그래서 그런가 이런 저런 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별로 멀지도 않은 강릉에 혼자 오는 것에 겁을 집어 먹은게 부끄러울 정도로 좋았다. 그 다음날부터는 왠지 내가 강릉에 온 게 소문이라도 난걸까 무척 바빴다. 일은 계속 있고 유달리 내 의견이 궁금한 동료도 많았다. 친구가 곧 도착하고 마치 내 집인양 친구를 맞았다. 장을 보러 가서 평일 내도록 먹을 음식을 챙겼다. 둘다 재택을 오래한 편이지만 이렇게까지 잘 챙겨 먹을 줄은 몰랐다. 음식물 쓰레기를 최대한 만들지 않고 주중에 배달 음식을 한 번인가 먹은 것 같다. 매일 밤 친구랑 넷플릭스를 윈도우 쇼핑 하듯이 이건 저랬다 이랬다 이야기 했다. 꽤 자주 보는 친구여도 항상 할 이야기가 많은 건 좋은 일이다. 그리고 되도록 아침에 일어나서 솔밭을 걸었다.
이따금 내 마음 상태에 대해서 비유할 때 왠지 85%나 90% 정도 찬 수납함을 상상한다. 가득 차 있어서 조금이라도 부풀거나 작은 것이라도 더 넣으면 터져 버릴 기세다. 이 즈음이라면 다들 그럴 듯하다. 회사에서 어린 것을 인질로 막무가내로 굴기에는 나이도 경력도 꽤 많이 챙겼다. 전에도 말했지만 맘대로 도망치듯 이직하는 것도 마뜩찮은 상황이다. 그 사이에 가진 것도 많아졌지만 그만큼 무엇을 못가졌는지도 알게 되어서 더 불행해지면 불행해졌지 행복해지기는 어렵지 않나 싶었다. 나만 챙길 것도 아닌 것이 이제는 나를 품어주던 사람들도 내가 품어줄 차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한시간 정도 내 걸음의 속도나 혹여나 같이 걷는 사람이 불편하지는 않을지 고민할 새 없이 혼자 걷는 건 아주 좋았다. 아침에 한강을 가면 나랑 비슷한 차림으로 나와서 강을 보고 멍 때리는 사람들이 많다. 바다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드문드문 아침부터 와서 바다 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니 혼자만의 묘한 연대감도 느꼈다. 아침에 업무 시작하기 전에 볼 수 있는 바다가 있고 그 바다마저도 매일이 다르다는 건 왠지 위로가 된다. 한강은 좀 입이 가벼운 인상인데 바다는 그러든지 말든지할 인상이라 바다를 보면서 온갖 생각을 다 헤집다 보면 곧 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노을을 보는 건 노력이 필요하고 어쩌면 꽤 비싼 일일지도 모르겠다. 제주도에 3주 정도 일하러 갔을 때 매일 어디서 봐야 노을이 이쁠까만 고민했던 시간이 생각났다. 일을 마치면 친구와 함께 산책을 자주 나가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침 노을을 봤던 날은 좋았다. 이렇게까지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물고기가 잡히는걸까 싶었지만 낚시 하려는 사람도 많았다.
계속 리모트 근무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능하다면 강릉에 거처를 마련해야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붐비는 도시가 주는 기쁨도 있지만 어딜 가건 최단거리로 가고 너무 많은 것을 가져야 하는게 피로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탓을 할 것도 없는 것이 나부터 그런 마음이 있으니까 자연을 더 가까이 해야지 않을까 생각했다. 조금 둘러가면 어떻고 조금 못 가진게 어떻담. 대단한 자연을 보면 정말로 내가 어쩔수 없는 것들에는 가로 막을게 아니라 올라타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 일주일 동안 잠을 푹잔 걸 보니 마음도 조금은 공감을 했던 것 같다. 나를 쫓는건 대부분의 경우 나 스스로다. 그게 아니면 일정과 마감이겠지만.
주말 즈음에는 친구 한명이 더 와서 휴가처럼 보냈다. 기다리던 넷플릭스 시리즈 새 시즌을 함께 정주행하고 난데 없이 배틀그라운드 시작해서 새벽까지 함께 했다. 바다에 가서 패들보트도 처음 타고 원하던대로 까맣게 탔다. 아무래도 와있어서 눈에 띄는 것인지 주말 예능에 강릉 이야기가 많았다. 우리가 갔던 해변이 아름다운 해변으로 소개 되고 우리가 먹은 음식을 신나게 먹는 사람들 영상도 봤다.
적다 보니 오늘 포스팅은 사실 일과는 일절 상관이 없다만 강릉에서 일하는 것이나 서울에서 일하는게 사실상 기록할 내용이 없을 정도로 같았다는 점에서 좋았다. 앞으로도 리모트로 근무할 수 있는 곳이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서울 또는 수도권에서만 살아야 하는 인생의 상상력은 꽤나 한정적이다. 조금 더 자연에 기대서 무덤덤하게 지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