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원 Jan 19. 2019

내 유년기의 생채기와 포개진 키키의 표정 하나

만남과 관계는 좀 체 알 수가 없다. 언제 어디서 시작할지 어디서 끝나게 될지. 또 얼마나 깊고 얕아질지. 수많은 만남들의 대부분은 이미 헤어짐이거나 미처 확인 못한 헤어짐 들이다. 그리고 아주 조금은, 여전히 미정인 채 ‘관계’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다. 희미해진 인연의 아쉬움은 너무나 흔하고 또 흔하므로, 오늘은 인연이라고 생각지 않으려 했던 마녀 배달부 키키를 만난 이야기를 해도 좋으리라.


나는 키키와 같은 나이 일 때 처음 그녀를 만났다. 모든 사람들이 성숙을 강요하는 13살에 키키는 독립을 했고 나는 고작 중학교로 발걸음 했다. 마녀는 13살이면 독립하여 자기가 살 마을을 찾아 정착해야 하고, 평범한 나는 중학교로 진학해야 한다는 각자의 숙명이었다. 중학교  입학은 세상의 모든 입학 중에서도 가장 낯선 시간이다. 초등학교 졸업도 힘겨웠던 그때보다 지금은 아주 조금만 덜 힘들어한다. 나는 그렇게 조금밖에 변하지 못했다.


오늘도 맑겠습니다. 내일도 맑겠습니다.

 마녀배달부 키키는 단지 내일까지만 맑다는 날씨예보를 구실 삼아 여행이 아닌 독립을 그날 밤에 떠난다. 키키에게 불안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20년이 지나도록 독립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키키와 나는 동갑이었지만 키키처럼 솔직하고 밝은 성격은 아니었다. 키키는 모르는 아기의 젖꼭지를 갖다 주러 한참을 날아갈 만큼 친절하고, 할머니 손님과 친구가 될 만큼 공손하며, 비행기에서 추락하는 친구를 구하러 뛰어들 만큼 순수했으니 마을 사람들은 그런 키키를 모두 좋아했다. 키키에게는 마녀의 피를 받아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닐 수 있다는 것 빼고도 언제나 밝은 표정을 지니는 능력, 주위 사람들에게 예쁨 받는 마법까지 있었던 걸까.


초등학교 때와 많이 다른 환경과 그 해에 불어 닥친 IMF의 전조들은 중학생의 기억을 무채색으로 물들였다. 허구임을 알면서도 내가 마녀가 아님을 원망한 건 성장에 대한 핑계였다. 나도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 모험을 하게 되면 용기가 생길 텐데 푸념하며 꾸역꾸역 8시까지 학교를 갔다. 수업시간은 지겨웠고 친구들과는 신났지만 그 속엔 질투가 있었다. 고등학교는 7시 40분까지, 회사는 8시 30분까지. 시간만 바꿨을 뿐 똑같은 아침이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영화들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 한 장으로 남은 사진이겠지만 나에게 마녀배달부 키키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걸어두는 사진이 될 줄은 몰랐다. 성인이 된 뒤에 다시 본 키키는 내 기억보다 겁이 많고 감정에 약한 아이였다. 무작정 떠난 수행의 길은 무계획적이었고 처음 본 사람에게 이 마을에 정착하고 싶다고 고백했다가 등을 돌리자 기가 죽어 골목으로 숨는다. 손님이 오지 않으면 심심하다고 불평하고 쇼윈도에 걸린 예쁜 옷들을 보기만 해도 허영심에 속상해한다.


필요 이상으로 도움을 주려했고 나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그런 것은 곧 실망이 되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자기 손으로 해결하다가 첫 데이트 시간도 늦어졌다. 단지 자신에게 웃어주는 사람한테 너무 많은 것을 주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 더 할 때 마음이 어느 쪽으로든 움직였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밝고 솔직한 키키는 어디로 간 걸까.”


내가 키키를 자꾸 떠올리게 된 이유는 이 부분이다. 모처럼 생긴 친구와 즐겁게 놀다가 그 친구가 문득 키키가 싫어하는 아이와 인사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웃음을 거두고 집으로 와버린다. 섭섭함에 친구를 밀어내고 마음을 닫았던 내 모습과 겹친다. 마음과 몸의 감기가 동시 와버려 침대에서 하루 종일 나오질 못한다. 가장 친한 친구 지지는 갑자기 알아듣지 못하는 고양이 말을 한다. 마법이 약해진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타고 마법 빗자루도 부러져 어두운 방에서 울음을 참으며 빗자루를 깎는 키키에게 힘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자신을 찾아온 화가 언니 우슬라의 오두막으로 기분 전환하러 간다. 그곳에서 아주 멋있는 그림을 보고 키키는 넋을 잃는다. 그런데 그 그림의 주인공은 ‘나’(키키)라고 한다. 감정에 쉽게 꺾이는 내가 아는 나와 달리 아주 화려하고 힘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언니는 저게 나의 모습이라고 한다. (어려서 만난 언니들은 당시의 그녀들 나이 곱절을 먹은 지금에도 여전히 언니답다.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멋있게 우러러보는 일은 지금은 잘하지 않는다.)


깊은 밤 키키는 고민을 털어놓고 우슬라는 자신도 그럴 때가 있고 한다. 나답지 않은 행동과 평소 능력에 못 미치는 결과들, 여러 시도들이 좌초되는 시기가 다른 사람에게도 있다니 한층 마음이 놓인다. 힘든 일이 있으면, 마법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일상을 견디는 것 말고는 누구나 어떻게 해도 잘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일. 그렇게 나도 스스로를 위로하고 도움을 받는 법을 배웠나 보다.

성숙한 언니 우슬라와 철없는 키키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같은 성우가 분했다고 한다. 사실은  실망하고 있는 사람도 북돋아줄 수 있는 사람도 나라는 것일까. 자신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동안에도 또 다른 나는 열심히 나의 멋있는 면을 기억하며 그리고 있었다. 물론 잘 그려지지 않아 고전할 때도 있다. 그럴 땐 그냥 계속 그리는 수밖에 없다. 언제 걷힐지 모르는 불안에도 기다림만 갖는다면 일어날 수 있다.


작년 모퉁이극장에서 동네 친구 두 명과 키키를 본 적이 있다. 그 친구들 역시 키키를 만났던 중학교에 1학년 때 만났다. 이 친구들도 20년 동안 만날 줄은 몰랐다. 키키에게 그러했듯 한때는 자주, 한때는 잊혔다가 지금은 편하게 만난다. 서로의 한계도 알고 기대를 줄인다. 하지만 애석하지 않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의 방식을 사는 것이다. 지금 아이처럼 많은 친절과 명랑함이 없는 것은 좀 아쉽지만 그 시절 나는 충분히 자주 가슴 벅찼고 또 상처를 받았다. 지금 하지 못하는 일을 그 당시에 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도 않고 크게 실수도 하지 않는 거리두기를 그 당시에 하지 않은 것도 잘한 일이다. 아마 지금쯤 바위섬처럼 고립되었을 것이다.


성장이라는 말이 민망한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손해를 보고 상처를 입힌다. 사람 간 거리를 재며 하루 종일 균형을 가늠한 날이면 혼자된 방에서 순식간에 무너지는 일도 다반사다.  그런 날 침대에 엎어져 키키처럼 읊조려 본다. ‘밝고 솔직한 키키는 어디로 간 걸까’ 그러면 불 꺼진 방에서 울먹이며 빗자루를 깎던 키키가 생각나고 어느새 우슬라가 그린 그림까지 생각난다. 나 자신이 맘에 안 들어 괴로운 순간에도 내 주변 사람들 기억 속에는 나를 좋은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비클립 11호, 비온후 출판사 201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