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농장 폐업합니다.

죄송합니다는 마법의 단어가 아니다.

by 동그라미

오늘의 삐약거리: '죄송합니다'의 함정


죄송합니다. 얼마 전까지 나는 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회사만 들어오면 죄송할 일이 어찌나 많은지 사과를 열심히도 건넸다. 물론 죄송하다는 말을 붙일 때마다 내가 잘못한 게 있던 건 아니었다.


업무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면서, 올라온 결재 기안에 수정할 부분을 발견해 반려가 필요했을 때, 추가로 확인을 해야 하는 일이 생겼을 때. 단순히 업무를 위한 사항들이었다. 그분들에게도 일이고 나에게도 일이었지만 처음에는 그런 부탁들을 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못할 부탁이라도 하는 듯이 죄송하다는 말로 완충지대를 두었다. 잘못이 있을 때 쓰는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서두를 열면 마음은 편했다. 그렇게 햇병아리의 사과 농장은 열심히 돌아갔다. 한데 역시 말에는 힘이 있다는 말이 맞나 보다. 월 결산을 하루 앞둔 시점, 메일이 한 통 왔다.


관계사였는데 본인이 알고 있는 금액과 우리 측에서 준 금액이 다르다며 확인을 부탁한다는 메일이었다. 전체 대사는 내가 담당하고 있지만 결산을 맡고 있는 사업팀의 일이 아니라 배경지식이 없어 확인이 필요했다. 두 번의 메일이 오가고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로가 가진 정보에 대한 확인의 과정이라기보다는 결과를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것에 가까웠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사업팀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그저 확인이 필요한 일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또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메일에도 썼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말은 정말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 같았고 기분은 바닥을 기었다. 사과 농장을 폐업해야 할 때가 왔다. 정말, 그래야겠다고 다짐했다.


죄송하다는 사과가 필요할 때는 정말 본인의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다. 습관성으로 하게 되는 반복적인 사과는 스스로의 자존감에도, 남들이 보는 내 모습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하는 말은 스스로를 지치게 하고 회의감 마저 들게 할 수 있다. 게다가 말의 힘이란 생각보다 커서 계속 쓰다 보면 남들에게 진짜 죄인이 되어 버린다.


진짜 사과가 필요할 때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가짜 사과를 이리저리 뿌리고 다닐 필요 없다는 뜻이다. 죄송하다는 마법의 단어가 아니다.


일할 때 진짜 필요한 것은 그런 사과가 덧붙여진 문장이 아니라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유를 설명하고 명확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태도다. 이걸 위해서는 내가 내 일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 일에 필요한 바를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이상의 사과는 그만! 그 분들도 일이고 나도 일이다. 정말 내 실수, 내 잘못이 아닌 이상 가짜 사과는 그만!



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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