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삐약거리: 겨울을 나봅시다
봄이 오고 있다. 어둑해 가로등 불빛이 들었던 출근길엔 햇빛이 돌고 목도리까지 꼭꼭 두르고 나섰던 점심 커피 시간은 외투 없이 호다닥 다녀올 수 있을 만큼 추위의 맥이 풀렸다. 해가 길어져 나는 물론, 모든 게 자기 색을 입고 있을 때 집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콧노래가 나온다.
그래, 봄인 거 너무 좋다 이거야! 그런데 내 겨울은 어디 갔냐구!
3번의 결산과 연말 자료 정리, 회계 감사, 시스템 연결로 이어지는 회사의 실뭉치들을 풀어내다 보니 2021년은 봄-여름-가을 만 남게 되었다.(사실 9월과 10월도 사라졌는데 이 이야기는 내가 꼭 진짜 꼭 다음 챕터로 쓸 거다) 작년을 돌아보았을 때 기말감사 준비했겠지라는 말 하나로 내 겨울을 퉁 치고 싶지 않아 정리를 해볼 겸 회사에서의 겨울나기를 써보고자 한다.
첫 번째 장작, 12월 연말 결산
결산 12번 하면 1년 금방 간다? 처음으로 입사했을 때 회계팀의 모든 분들의 입에서 저 말이 나왔다. 결산 1번이면 한 달인데 내가 결산만 하고 사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고 당시에는 생각했더랬다. 2년이 지난 지금. 저 말은 회계팀의 이치나 다름없다.
한 달에 한번, 1년에 열두 번 하는 결산인데 연말 결산이 뭐 그렇게 다를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12월이 특별한 이유는 마지막이라는 데에 있다. 대부분의 회사는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영업 활동을 지속할 거라는 '계속 기업'을 전제로 한다. 계속 기업들이 경영을 잘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기업의 삶에서 한 부분을 잘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이때 보통 1월부터 12월이 한 묶음이다. 묶인 달들에서 실수가 있었다면 묶음 안에서 수정할 기회가 주어지는데, 12월은 그 마지막 달이다 보니 굉장히 중요하고 예민한 달일 수밖에 없다. 답안지 걷기 10분 전의 느낌이랄까.
1월 실수를 2월에 발견했다면 실수의 크기와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2월에 반영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반면 12월 실수를 1월에 발견했다? 머릿속에서 베토벤의 운명이 재생되기 시작하는데.. 한 겨울에 식은땀이 나고 잔뜩 찌푸려진 윗 분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연말 결산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연말에 분기에 반기까지 겹친 세제곱의 달..만만치 않다.
2021년은 내가 홀로 서는 첫 번째 결산이기에 더 신경이 쓰였다. 1월부터 담당하기 시작한 사업부는 점점 투자를 줄여가고 있는 곳이라 새로운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 전 것을 걷어가는 단계라 신경 쓸 곳도 넓고 수기로 해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분기와 반기마다 추가되는 업무도 있고 전의 담당자분이 다른 팀으로 이동하게 되어 인수인계받을 때도 만만치가 않았다. 해내긴 했지만 솔직히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잘 모르겠다. 받아서 작업해야 할 자료는 좀 늦게 넘어왔고 이것만 쳐내고 해야지 했던 일이 뒤로 밀리면서 더 정신이 없었다.
두 번째 장작, 기말 감사
나 진짜 어떻게 일했던 거지. 기말감사에서 느낀 소감은 대충 이랬다. 기말감사 때에 주고받는 자료야 세 자릿수로 셀만큼 많지만 그중에서도 내 머리를 세게 친 건 결산 명세서였다. 결산 명세서. 매월 혹은 매분 기마다 결산 이후 세부 내역을 만들어 재무상태표, 손익계산서와의 숫자를 비교해보는 표인데 처음 내가 작성했던 결산 명세서에는 재무상태표와의 숫자를 비교하는 칸만 있었다.
작성하면서 분명 재무상태표와의 숫자랑은 값이 딱 맞았고 그렇게 열두 달을 맞는 숫자라고 의심하지 않은 채 결산 명세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회계사로부터 온 Re: 에는 내가 만든 결산 명세서의 숫자가 손익계산서와 다르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악..왜 이걸 생각 못했지. 재무상태표가 결과 값이라면 손익계산서는 과정의 값으로 볼 수 있는데, 한마디로 결과 값만 같다는 걸 보고 과정은 생각도 안 한 거였다. 새벽에 혼자 남아 결산 명세서를 고치면서 결과만 맞다고 다 맞는 건 초등학교 때 끝났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정신 차리자.
그리고 무더기로 오는 샘플링. 감사를 할 때면 회계사들은 수십 개의 샘플링을 뽑아 주는데 전표의 세금계산서, 관련 기안, 계약서 등 증빙을 찾아서 건네주면 된다. 한 마디로 1년간의 전표 중 샘플을 뽑아 이게 이 숫자가 맞아요? 물으면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이 숫자가 맞아요~하고 대답해주는 과정이다. 보통 샘플링은 해당 사업팀을 맡고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지만 담당자가 필요하지 않은 대부분의 단순한 것들은 내 차지였다. 허헝 너무 싫어 샘플링.
채권채무 조회서라는 것도 있는데 우리 전표의 채권 금액과 상대 회사 전표의 채무 금액이 일치하는지 서로 확인을 위해 우편으로 주고받는 조회서다. 이걸로 우체국을 몇 번은 들락거린 것 같다. 도장 찍을 때마다 기안을 써야 하는 건 슬펐지만 도장 찍는 건 좀 재미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세 번째 장작, 주석 작성
사실 기말감사와 주석 작성은 함께 간다. 회계법인에서 감사보고서에 대한 의견을 내는 만큼 감사에는 주석의 검토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워낙 크고 중요한 일이라 하나의 장작으로 빼둘 수밖에 없었다. 이것 때문에 밤을 새우는 걸요!
일단 주석을 작성하기 위한 밑 작업을 선임님께서 해주시고 이 밑 작업이 완료된 엑셀 파일을 뿌려 각자가 맡은 부분을 작성한 다음 합쳐서 금액을 검증한다. 주석을 쓰는 엑셀 파일 자체가 시트도 엄청 많고 전부 다 식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더 신경 쓸 게 많다.(이런 파일의 밑 작업을 하는 선임님은 대체..) 그래서 주석을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어찌어찌 모두 TRUE 값이 뜨더라도 합치고 나면 FALSE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 그럼 울면서 다시 어떤 값이 틀렸는지 찾아내 고치면 된다.
주석을 작성할 때 맡은 곳이 현금흐름표와 접점이 많았는데 뭔가 숫자가 계속 어그러져서 현금흐름표 만드신 분도 털리고 나도 탈탈 털렸다고 한다..이분도 처음이고 나도 처음이라 물음표가 백개는 떴는데 그래도 집단 지성의 힘을 이용해 어찌어찌 잘 끝났다. 팀에 인원이 줄고 처음으로 한 기말감사이자 주석 작성이라 다들 걱정이 많았는데 그래도 생각보다 잘 끝낸 것 같았다.
네 번째 장작, 시스템 연결
감사가 끝나고 난 후, 졸음이 가득한 내 눈앞에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시스템 개발이었다. 타 부서에서 개발된 시스템을 ERP에 연결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 연결을 위해서 ERP의 일부 정보가 연결될 시스템의 정보와 일치되게끔 조정이 필요했다. ERP의 해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나였기에 이 일은 내 몫이 되었다.
잘못하면 회계시스템의 정보가 틀어질 수도 있는 일이라 초기 데이터를 제대로 설정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자료가 워낙 방대하다 보니 초기 데이터를 만들고 검증하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게다가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다른 팀에 협조를 구하고 자료를 받고 하다 보니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머릿속을 가장 복잡하게 만들었던 건 업로드의 시간이었다. 검증을 거치고 예쁘게 다듬은 자료를 올리려는데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테스트 없이 바로 본 서버에 올릴 뻔했다. 보고 과정에서 팀장님께 제지당하긴 했지만.
테스트 서버에 올리는 작업을 순탄하게 마치고 본 서버에도 자료를 넣으려는데, 와..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 테스트 서버가 너무 단순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없었던 새로운 문제들이 불꽃놀이 마냥 팡팡 터졌다. 다들 퇴근하고 한 시간이라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고 막막했지만 지금까지 개발자에게 물어본 Q&A들을 가지고 어떻게든 해결을 봤다.
이 경험으론 작업을 해냈다는 사실보다도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일은 혼자 해낼 수밖에 없다는 것과 문제는 항상 있지만 그걸 해결할 방법 또한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 일은 역시 못하면 안 되고 잘하면 당연한 일이라는 것..
이렇게 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그냥 겨울이 없어진 건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열심히 회사에서 장작을 팼고 없어진 게 아니라 어딘가에는 쌓여 있겠지.
오늘은 여기까지 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