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것'을 향한 끊임없는 염원
영화는 공시성(Synchronicity)에 관한 3개의 도시괴담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한 노인을 살해한 세명의 청년들의 이름이 우연히 마을이름과 똑같다는 이야기, 호수에서 잠수를 하던 스쿠터 다이버가 물을 끌어올리던 소방헬기 호스에 빨려 들어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 부부싸움을 하다 장난으로 쏜 엽총의 총알이 우연히 난간에서 떨어지던 한 청년에게 맞아 살인미수로 되었다는 이야기. 영화에서 내레이터는 세 사건을 설명하면서 이것은 단지 우연, 혹은 확률의 개념으로서 설명할 수 없는 사례라는 견해를 내비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인과적 법칙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면서.
[매그놀리아]는 다중플롯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영화이다. 일반적인 영화들처럼 하나의 굵직한 이야기를 따라가는것이 아니라,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여러 개의 이야기가 한데 묶여 188분이라는 러닝타임을 형성한다. 어떤 면에서는 여러 개의 단편이 묶인 옴니버스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매그놀리아]에서 문제는 그 여러 개의 이야기들이 '동시에' 교차편집되며 진행된다는 것이다. 가령 한컷이 끊어지면 곧바로 다른 이야기로, 또 한컷이 끊어지면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는 식이다. 죽음의 문턱에선 아버지가 오래전 연락이 끊긴 아들을 찾는다는 이야기, 이웃의 신고로 집을 조사하게 되는 경찰관의 이야기, 퀴즈쇼에 나간 어느 한 아이의 이야기, 또 한편 아주 어릴 적 퀴즈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피폐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 마약과 매춘으로 방탕한 삶을 살고 있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 등등. 이렇듯 여러 개의 이야기가 교차편집으로 진행되는 [매그놀리아]의 처음 1시간은 매우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이야기 사이에는 인과관계를 찾아볼 수가 없고, 영화의 의도조차도 알아챌 수 없다. 잔가지처럼 멋대로 뻗어있는 짤막한 이야기들에는 어떠한 목적성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개의 이야기가 중첩되어 갈피를 종잡을 수 없는 와중, 그럼에도 관객은 여러 개의 이야기 속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 점차 배우게 된다. 저마다의 인물과, 저마다의 상실과, 저마다의 정서를 어느 순간부터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공감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혼란스럽게 배치되어 있던 이야기들의 나열 사이에 인과관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퀴즈쇼를 매개로 공유하던 이야기 간의 관계는, 같은 세계임을 나타내는 지표로 이용되는 날씨를, 그리고 등장인물을 공유하게 되면서 결국 하나의 온전한 플롯와 메시지를 이루게 된다.
[매그놀리아]의 이런 특이한 구조는 단순히 기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형식의 창의성이 [매그놀리아]의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다. [매그놀리아]의 형식은 전적으로 '이야기'를 위해 존재한다. 혼돈성을 지닌 채 복잡하게 꼬인 '형식'에는 영화의 정서가 대변되어 있다. 그 일련의 이야기들 속에는 저마다 어떤 부분의 공허함이 존재한다. 죽음의 문턱에 선 어느 한 가장은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소홀히 한 것을 후회하고, 경찰관과 방탕한 생활을 지내던 여인은 진정한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고, 과거의 영광에 기댄 채 방황하는 한때의 퀴즈 신동은 나누어줄 사랑은 많은데 누구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울부짖고, 퀴즈쇼에 나간 아이는 더 이상 장난감처럼 이용되기 싫다며 방송을 펑크 낸다. 일련의 이야기들 속의 '불완전한 존재'들은 어떤 무엇인가에 종속된 채 공허함을 어루만지며 그 고통에 신음한다. 존재의 의의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과거의 잔향들이 따라다니며 계속 괴롭히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절망한다. 혹은 회피한다.
그 순간, 하늘에서는 개구리 비가 내린다.
개구리 비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붕과 유리창을 내리친다. 아프게. 무진장 아프게. 자살하려 겨눈 총구를 때리고, 훔친 돈을 다시 되돌려놓기 위해 파이프를 올라가던 사람을 때리고, 자살시도를 한 사람을 실은 엠뷸런스는 중심을 잃은 채 엎어지고, 아버지의 임종의 순간에서 개구리 비는 슬픔을 대변하듯 그렇게 아프게 내린다. 보는 이의 마음을 다 찢어질 놓을 것만 같이.
[매그놀리아]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느닷없는 우연의 연속 속에서 우리의 뇌는 이해하기를 거부할 것이고, 앞으로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내리는 개구리 비속에서 등장인물들은 구원을 보았다. 누군가의 삶이 끝나고, 평생을 회피했던 과거를 직면하고, 비싼 교정기를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불완전한 존재'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구원받는 것이다. 애초에, 우연이라는 단어도 세상의 불완전함을 가장한 말이고, 세상은 인과법칙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곳이니까.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저마다의 사람들은 세상을 닮아 불완전하다. 그렇기에 삶이기도 하다.
참고로 영화 전반의 주제를 아우르는 공시성(Synchronicity)을 주장한 칼융은 사실 노년에 노망 나서 별생각 없이 지껄인 것에 불과하다. 비타민C가 감기에 좋다는 낭설을 퍼트린 장본인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