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멈춰야 보이는 것들

by 은하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속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의 나는 참 바쁘게도 살았다. 나의 하루는 일과 아이들의 일정, 남편의 병원 예약, 그리고 집안의 크고 작은 소음들로 빼곡했다. 그 모든 톱니바퀴가 오직 내가 챙겨야만 무사히 굴러간다고 믿었던 시절이다. 내가 멈추는 순간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손을 놓는 순간 도처에 구멍이 생길 것 같아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래서 달렸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단순한 피곤함쯤으로 치부하며 모른 척하는 쪽을 택했다. 쉬는 것은 일종의 사치였고, 남들보다 느려지는 것은 곧 패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은 결국 나를 강제로 멈춰 세운다. 다정한 설득이 아니라, 서늘한 경고를 통해서 말이다.




진료를 받고 돌아오는 길, 나는 처음으로 그동안 꽉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아보려 애쓴다. '어떻게 더 버텨낼까'를 고민하던 머릿속에 '무엇을 더 덜어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채워 본다. 막상 멈춰 서서 돌아보니 풍경은 생각보다 평온하다. 아이들은 이미 자기 자리에서 제 몫을 잘 해내고 있었다. 아빠의 아픔을 함께 겪으며 아이들은 스스로 준비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며 부쩍 자라 있었다. 남편 또한 고통의 시간을 지나오며 자신의 몸을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대하는 법을 익혔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믿었던 수많은 일 중 상당수는, 사실 조금 늦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들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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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가 얼마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스스로를 몰아세웠는지, 얼마나 많은 밤을 홀로 껴안고 버텨왔는지.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고단했던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조금 느리다고 해서 정말 늦는 건 아니다. 한창때처럼 앞만 보고 달리지 못한다고 해서 인생의 패배자가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타인의 속도로 나를 재고 있었다. 누가 더 빨리 가는지, 누가 더 많이 해냈는지. 그 좁은 잣대 안에서 늘 부족하고 뒤처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기준을 바꾸니 풍경이 달라진다. 남들이 늦었다고 말해도 그 기준이 '나'라면, 나는 결코 늦지 않았다. 남과 비교하는 순간 내 삶은 한없이 작아지고 내 걸음은 초라해지지만, 내 속도를 내가 정하면 그 길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오늘을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만이 내일도 씩씩하게 살아낼 수 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결과가 아니라, 지금 발밑에 놓인 작은 기쁨들을 알아보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무엇도 늦은 것은 아니다. 이제는 내 걸음에 맞게 가려한다. 넘어지지 않는 속도로, 그리고 지치지 않는 방향으로.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이제 내 곁에 조용히 머물기 시작했다.








< 곁에 두는 말 >


: 남의 속도에 나를 맞추려다 소중한 오늘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내 걸음에 맞는 속도로 걸을 때, 비로소 풍경이 보이고 숨이 쉬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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