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다시 시작하는 마음

by 은하


돌이켜보면 삶은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거센 파도에 순식간에 뒤집힌 줄 알았는데, 사실 매 순간 조금씩 흔들리면서도 그보다 조금 더 간절히 버텨내고 있었다. 그 위태로운 틈바구니 속에서 비로소 다시 서는 법을 몸소 익혔다. 남편의 병이 예고 없이 찾아온 시작이었고, 나의 진단이 그 뒤를 이은 버거운 추격전 같았지만, 이제 그 시간은 단순한 아픈 시기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지독한 통증의 터널을 통과하며 서로의 얼굴을 비로소 마주하게 되었고, 공기처럼 당연했던 평범한 하루의 소중함을 뼈아프게 실감했다.




삭막한 병원 복도에서 말없이 순서를 기다리던 긴장의 시간들, 재활을 위해 공원을 거북이처럼 걷던 어느 오후, 그리고 입맛 없는 서로를 다독이며 마주 앉아 밥을 먹던 고요한 순간들. 이전이라면 지루함 혹은 정체라고 불렀을 그 장면들이, 지금은 어떤 두려움보다 먼저 마음속 가장 따뜻한 곳에 차오른다.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쓰고 싶은 글이 있고,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며, 더 나은 나로 나아가고 싶은 욕심도 여전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뜨거운 마음이 오늘의 평온을 밀어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앞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만큼이나, 지금 곁을 지키는 이들의 온기를 느끼는 손길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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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당연한 존재가 아니었다. 서로의 무너짐을 목격하고 그 파편을 함께 치우며, 묵묵히 견뎌낸 시간의 층위 위에 단단히 뿌리내린 사람들이다. 오늘 서로의 눈을 맞추고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축복인지, 아픔이라는 혹독한 수업을 통해 이미 충분히 깨달았다.




아픔은 삶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갉아먹던 조급한 속도를 바꿔놓았을 뿐이다.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살피며, 조금 더 가까이. 아프지 않았던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통을 통과해 온 삶은 이전과 분명히 다르다. 상처 입은 자리에 새살이 돋듯 더 조심스럽고, 흉터가 남은 자리만큼 더 단단하며, 무엇보다 서로를 존재 자체로 귀하게 여길 줄 알게 되었으니까. 다시 시작한다는 건 거창한 결심이나 화려한 재기가 아니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오늘 하루를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는 일,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오늘도, 다행히 우리는 함께 있다.

이 사실 하나면, 나의 마흔은 더할 나위 없다.








< 곁에 두는 말 >


: 마침표는 끝이 아니라 다음 문장을 시작하기 위한 숨 고르기입니다. 아픔을 지나온 오늘이 어제보다 조금 더 다정하고 단단하기를 응원합니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아프니까 사십이다'라는 다소 투박한 제목으로 시작한 이 기록이 어느덧 마침표를 찍습니다.

나의 통증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게 느껴지던 날들, 누군가에게 내보이기 부끄러워 꽁꽁 싸매두었던 속마음을 글로 옮기며 저 또한 참 많이 울고 웃었습니다. 제 글이 누군가의 시선에 닿고 있다는 막연한 믿음은 병원 복도의 서늘한 공기를 견디게 해 준 가장 따뜻한 온기였습니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주는 무게, 그리고 갑작스러운 아픔 앞에 휘청였던 저의 이야기가 비슷한 터널을 지나고 계신 누군가에게 작은 촛불 하나만큼의 위로라도 되었기를 바랍니다. 글을 쓰는 동안 저 스스로가 가장 큰 위로를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저는 제가 쓴 글처럼 나만의 속도로 일상을 성실히 살아내려 합니다. 아픔은 끝이 아니라, 삶을 더 깊게 들여다보라는 다정한 경고였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저의 서툰 걸음과 문장들을 묵묵히 지켜봐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부디 넘어지지 않는 속도로 행복하시길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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