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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생각 Mar 24. 2017

엄마의 봄바람

낯선 생각

"이 나이가 되어서 보니 나는 지금껏 꾹꾹 참고 견디고만 살고 있더라."

"지금까지?"

"응,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버티기만 했나봐."


봄이 되면 나는 쑥떡이 왜 이렇게 당기는 걸까. 그것도 직접 캔 쑥으로 갓 만든 쑥떡, 쑥인절미, 쑥버무리 무엇이든 좋다. 딱 이맘때의 파릇파릇한 쑥을 놓칠 수가 없다. 그래서 친정엄마와 경주에 있는 외가로 쑥을 캐러 가는 길이었다. 엄마의 묵직한 고백을 들은 건.

딸은 엄마의 팔자를 닮는다고 한다. 그 말을 아주 어릴 때부터 들어온 것 같다. 사람들은 그것이 칭찬이라고 했겠지만 내가 본 엄마의 삶은 솔직히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결혼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시부모님을 모셔야했고 그렇게 벌써 35년을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만 살아오셨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의 시집살이가 시작된 것이 겨우 엄마 나이 스대여섯이었으니 그 마음이 어땠을까.  다정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남편에 어린 아이들, 시부모님, 출가하지 않은 시동생과 시누이까지 건사해야 했을 엄마. 그래서 엄마 팔자를 닮는다는 그 말이 싫었다. 행복해 보이지 않는 엄마의 삶이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야 겨우 이해하는 나이가 됐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고백이 그리 놀랍진 않았다. 다만 ‘왜 아직까지 그걸 모르고 계셨지? 다 보이는데...’ 라는 생각이 잠시 스칠 뿐이었다.



추운 겨울 꽁꽁 얼어붙은 땅을 뚫고 새싹이 고개를 내밀기까지 그 힘듦을 누가 알까.

아마 엄마도 결혼하고 이제까지 살아온 37년이라는 세월이 한 겨울 같지 않았을까.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고, 그 누구도 쉬운 사람 없는 집안에서 언 땅에 부딪히고 깨지면서 아파하고 울고 그렇게 견디고 잘 버티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말이다.


경주 외가에 도착해서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쑥을 캐러 밭둑으로 갔다. 휘이 둘러보니 쑥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쭈그리고 앉아서 겨우내 말라붙은 덩쿨을 걷어내니 푸릇한 쑥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에게 쑥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고 함께 쑥을 캐기 시작했다. 살짝 써늘하던 바람이 걷히고 등에 내리쬐는 봄볕이 뜨거워져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비닐봉지 2개에 가득 쑥을 담았다. 생각보다 쑥 캐는데 열심인 어린 녀석들이 대견했다.


우리 엄마 뒷모습

"참 행복한 것 같아. 지금. 이런 시간이."

"응. 그치?"

"우리 이제 행복하게 살자. 너무 참지 말고, 견디지 말고."


나는 사실 진작에 봄을 맞이했는데 엄마는 이제 봄바람이 분다고 했다. 이제야 봄꽃들이 싹을 틔우고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 마음이 살짝 아리기도 하고 간질간질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우리네 인생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고들 한다. 과연 우리네 인생의 계절이 한 번 뿐일까? 매년 사계절이 돌아오듯이 우리 인생의 계절 역시 돌고 도는 건 아닐까. 엄마의 인생에 새 봄이 오고 있듯이 말이다.


엄마가 사랑하는 프리지어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무아의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그걸 얻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고 한다. 아직 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이라 늘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조금 더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다. ‘무아’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면 제일 좋겠지만 지금 내가 깨달은 것은 ‘깨어있기’의 소중함이다. 참고 버티는 것이 결코 능사가 아니라 찰나의 편안함과 행복함을 조금이라도 마음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체의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달려 있다는 가르침을 몸소 느끼는 2017년의 봄이다. 프리지어를 제일 좋아한다는 엄마는 봄만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우리 엄마에게 봄바람이 불고 있다. 어느덧 예순을 맞이하고서야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조금은 벗어내고 작은 행복을 찾으며 살 거라고 하신다. 고마운 바람이다. 행복한 바람이다. 나는 엄마의 봄바람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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