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ll Mar 26. 2022

요즘 풍류

현대 사회 필수품, 풍류를 즐기는 법



속되지 않고 운치 있는 일이라는 풍류는 현대 사회의 필수품이다. 사방이 부동산과 돈에 대해 송사를 펼치는 이 세상에서 운치를 가지기 위해 풍류를 꼭 즐겨야 한다. 이 현대 사회 필수품을 나는 전시회를 보고 레스토랑을 가는 문화생활로 취했다. 그 방법은 꽤나 까다롭지만 즐겁다.



일단 관람할 전시회를 고르는 것부터가 풍류의 시작이다. 꼼꼼하게 나의 내면이 원하는 전시가 무엇인 지 파악을 해본다. 주말에 사람이 많아 관람객들이 기차를 만들어 줄 서서 보게 되는 유명한 전시여도 좋다. 아무도 이 전시를 몰라 큰 전시장에서 홀로 관광객이어도 좋다. 속에서부터 관람 욕구가 슬슬 차올라, 전시장 입구를 들어설 때쯤이면 넘칠 듯 찰랑찰랑하게 가득 찬 설렘을 담아 들고 갈 전시회면 된다. 보러 갈 전시회를 정하고, 예약까지 완료하면 관람을 끝나고 갈 레스토랑을 꼼꼼히 정한다. 마음의 양식을 채웠으니 내 배의 양식도 채울만한 근사한 곳으로 정한다.

 



지난가을 고궁 미술관에서 <고려 미색> 전을 관람했었다. 벨기에 왕립 예술 역사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고려시대 공예품 여덟 점이 전시된 것인데, 이번에 수리를 위해 한국에 왔단다. 이들은 전시가 끝나고 고국을 떠나 다시 금가지 않는 한 벨기에에 머물 것이다. 다시 한국땅을 밟지 못할 자기들을 보러 나는 경복궁역으로 향했다. 마지막 인사라 평일이어도 많은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내가 유일한 배웅객이었다. 세상과 나를 단절하는 묵직한 고요함과 여덟 점의 도자기들이 만났다.


보름달 모양에 버드나무가 그려진 조명 앞에 여덟 개의 도자기들은 깨끗해진 말간 얼굴로 유리장 속에 들어가 있었다. 일본의 긴쓰기 기법으로 수리되었던 금 간 곳들은 다시 올바른 방법으로 메워졌다. 벨기에인들은 있는지도 몰랐을 뚜껑이 생겼다. 청자 상감 무늬 발 속에 그려져 있던 학들은 군단이 되어 그릇을 가득 채운다.

가까이서도 멀리서도 한참을 바라본다. 어떤 생각으로 이 버드나무가 그려졌을까. 어쩌다가 이 도자기는 색을 바란 듯, 새것인 듯한 색을 가지게 되었을까. 표주박 모양 주자는 어쩌다가 이 귀여운 뚜껑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청자에 그려진 포도를 따려는 동자는 그 포도를 가지고 무엇을 할 요량이었을까. ‘어쩌다가’가 반복됨에 따라 나의 사색도 길어진다. 도자기들이 벨기에로 가기 위해 포장되듯이 나는 사색에 깨지지 않기 위해 꽁꽁 포장된다. 나를 둘러싸는 포장들은 겹겹이 쌓여가 현실과 단절되어 내 머릿속의 망상과 생각들을 한 단계 올려준다. 고민이 사색이 되고 사색이 철학이 된다. 그 철학은 이 작은 전시장을 휘저은 뒤 나만의 깨달음으로 돌아온다. 이것의 나의 문화생활이다.


마음의 양식을 가득 채운 후 간 레스토랑에서는 꼭 와인을 시킨다. 전시장이 아무리 멀고 교통이 힘들어도 대중교통을 타고 가는 이유는 내 문화생활의 마침표를 와인으로 끝내기 위해서다. 소금집의 잠봉 뵈르와 차갑게 칠링 된 나파밸리의 샤도네이를 평일 오후 1시에 보란 듯이 주문한다. 식사를 하고 자신의 자리로 바삐 돌아가는 직장인들을 보며, 천천히 와인을 넘긴다. 1시간이 넘는 시간을 대중교통을 타고 와 사색을 즐기고, 약주를 즐기는 내 모습이 꽤 운치 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이 풍류가라는 생각과 약간의 취기가 더해져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신라 시대 학자 최치원은 풍류가 신라의 현묘한 도라고 했다. 무료 입장권과 짜디 짠 샌드위치, 와인 한 잔으로 깊은 사색을 즐긴 나는 이 현묘한 도에 취한 것임에 틀림없다. 빠른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빌딩과 직장인들 사이에서 유유자적 혼자서 고독히 풍류를 즐기는 나 자신이 제법 멋있다. 요즘 풍류다.


Photo by Pim Chu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50만 원으로 고통과 행복을 사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