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창가 끝자리.
나는 턱을 괴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3교시 국어 시간.
선생님의 목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 어디쯤의 톤.
마치 냉수보다는 뜨겁고 온수보다는 차가운 미온수 같은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에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창밖을 잠깐 봤다.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봄 언저리의 날씨에.
저 바깥은 완전히 비어있는데
나는 여기 닭장 같은 곳에 갇혀
졸음과 지루함에 익사하고 있었다.
교실 뒤편의 시계를 힐끔 봤다.
겨우 3분밖에 안 지났다.(와..)
생각해 보면 어른이 된 후에
회사 다닐 때도 가끔
이런 시간에 정지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하.... 너무 졸리다. 시간 더럽게 안 간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웠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바니타스 정물화를 그렸다.
화려한 꽃과 과일, 금은보화 옆에 해골과 모래시계,
꺼져가는 촛불을 함께 그려 넣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전도서의 구절처럼,
삶의 덧없음을 사물로 표현한 것이다.
해골 옆에 놓인 장미는 시들어가고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가장 아름답게 피어 있다.
촛불은 꺼져가지만,
그 불꽃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과일은 썩어가지만,
지금은 가장 탐스럽게 익어 있다.
그림이 말하려는 것이
모든 것의 무의미가 아니라
모든 것은 지나가니까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마라 같았다.
나는 교통사고가 났을 때 주마등을 경험했었다.
체감상 찰나였는데,
그 찰나에 시간은 느린 배속을 걸어놓은 것 같았고,
영상은 빠르게 지나갔다.
진짜 평생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
한순간에 빠르게.
메멘토 비베(Memento Vivere)는
라틴어로 "살아 있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짝을 이루는 말이다.
하나는 죽음을 향하고, 하나는 삶을 향한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소중하고,
삶이 있기에 죽음이 의미를 갖는다.
내가 주마등을 경험했을 때 스쳐간 건
후회 목록도, 업적의 정리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살아 있었던 장면들이었다.
난 아직도 잠이 안 오면 그런 목소리를 찾곤 한다.
이상하게 잠이 잘 온다.
변하지 않는 것들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변해간다.
바니타스 정물화 속 촛불은 꺼져가고,
꽃은 시들어간다.
하지만 그림 속에서 그 순간은 영원히 포착되어 있다.
덧없음 속에서 포착된 영원.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기억을 남기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순간들 속에서,
무언가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