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싶은 곳도 가야 할 곳도 없으니 차를 빌리지 않아도 됐다. 흐리고 비 오면 숲으로, 해가 좋은 날은 바다로 가면 되지. 제주도 같은 좋은 여행지에서 꼭 어느 바다 어느 숲일 필요는 없다. 사실 이것저것 따져가며 미리 갈 곳을 정하는 것이 귀찮다. 게을러서 발생한 손해는 나만 보면 된다. 혼자 와서 가장 좋은 점은 나의 결정으로 발생한 문제에 대해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비가 오다가 말다가 하는 오전에 이중섭의 그림들을 보고미술관에서 나와 비자림으로 가는 버스를 검색했다. 두 번의 환승이 필요했고 중간중간에 기다려야 할 시간은 예상할 수없었다.서귀포 올레 시장에서 첫 버스를 탔다. 중산간 도로를 달리는 버스는 거칠다. 급출발, 급정거, 급커브에 익숙해질 때쯤 산 중턱에서 내렸다. 웬걸! 환승할 버스가 바로 와서기분이 좋았다. 그것은어딘가도시 사람다운기쁨이었다.두 번째 버스를 타고 송당리에 내렸다. 다음 버스를 타야 되는데 40분이나 기다려야 한단다.
비자림까지는 5km, 그 정도면 걸을만하다.이마을에는 특색 있는 카페들이 몇 보였다. 40분 이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버스를 타도 된다. 선뜻 결정이 어려울 때 나는 걷는 쪽을 택한다.혼자가 아니라 같이 다녀야 하는 경우라면? 나는 걷는 대신에 '송당리 카페'로 검색을 하고, 비교하고, 따져보고, 선택지를 제시했을 것이다. 서로를 배려하려는 마음, 책임을 피하려는 마음이더 많은 선택지와 더 많은 선택 장애를 일으킨다.
도로를 따라 조금 걷다 보니 마을과는 멀어졌다.아침 비를 머금어 짙어진 흙과 돌이게워내는수증기냄새, 저마다의 안개구름을 붙잡고 있는 나지막한 오름들, 지표를 덮고 있는 식생은 내가 사는 곳과는 사뭇달라 좋고,다양하고 끊임없는 새소리는 혼자라는 생각을 잊게 한다. 걷기를 참 잘했다.다만 산간의 도로는 인도가 없어 걷기에는 조금 위험했다. 차 소리가 나면 나는 가장자리 흙길로 피했고, 그런 나를 보는 차들은 중앙선을 살짝 넘어가며 나를 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