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세금과 분노의 왜곡
이 사회에서
세금은 언제나
숫자가 아니라 감정으로 논의되었습니다.
얼마를 냈는가 보다,
누가 안 냈는가가
더 큰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분노는
항상 아래를 향했고,
의심은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쌓였습니다.
소득세를 환급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을 했고,
급여를 받았으며,
매달 원천징수된 세금을 냈습니다.
다만,
연말이 되었을 때
공제와 장려금이 적용되었고,
그 결과
돌려받는 금액이 있었습니다.
이 숫자는
곧 다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세금을 안 내는 사람들.’
그러나 이 사회는
소득세만을
세금이라 인식했습니다.
사람들이
매번 소비할 때마다 내는 세금,
전기요금과 통신요금에 포함된 세금,
교통비와 식료품에 붙는 세금은
쉽게 지워졌습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과세 상태라는 점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세금은
월급명세서에서만 보였고,
지출 속에서는
보이지 않게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이 구조 속에서
기여는
점점 한 방향으로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근로소득이 있는 사람은
항상 기여를 증명해야 했고,
소득이 낮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설명을 요구받았습니다.
반면,
자산으로 생활하는 방식은
좀처럼 기여의 영역으로
호명되지 않았습니다.
소득이 기록되지 않는 방식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전략으로 불렸습니다.
같은 ‘0’이었지만,
어떤 ‘0’은 능력이 되었고,
어떤 ‘0’은
도덕적 결함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이 사회는
공짜를 혐오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래에서 돌아오는 것을
혐오했습니다.
위에서 빠져나간 것은
효율이 되었고,
아래에서 되돌아온 것은
낭비로 불렸습니다.
이로 인해
분노는
항상 같은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기여가 적은 곳이 아니라,
가시적인 곳으로.
결국 문제는
누가 더 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기여하고 있는지를
이 사회가
제대로 식별할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기여는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기여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은
다시 바뀌었습니다.
누가 세금을 더 냈는가가 아니라,
왜 이 사회는
기여를 이렇게 왜곡해서
인식하게 되었는가.
왜 분노는
항상 가장 약한 고리로
향하게 되었는가.
기본소득은
이 질문 앞에서
다시 호출되었습니다.
분배를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여를 다시 보이게 하기 위해서.
이 사회가
무엇을 함께 짊어지고 있는지,
다시 말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