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새로운 무조건성의 재정의 — 시민서비스라는 책임의 이름
한국형 기본소득은
무조건성을 부정하며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출발점은
기존 기본소득 이론이 오랫동안 지켜 온
가장 핵심적인 원칙이었습니다.
조건 없이,
선별 없이,
질문 없이 지급하는 것.
이 원칙은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조건성은
낙인을 제거하고,
행정 비용을 줄이며,
국가가 개인의 삶을 심문하지 않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장치였기 때문입니다.
한국 역시 이 원칙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도를 현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한국은 하나의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무조건성은
이 사회의 구조 위에서
어떤 의미로 작동하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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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기본소득 이론과의 결별
기존 기본소득 이론에서 말하는 조건성이란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일하고 있는가,
얼마를 버는가,
몇 살인가,
아픈가,
쓸모 있는가.
이 조건들은
사람을 선별하기 위한 기준이었고,
그래서 기본소득 이론은
이 모든 조건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한국형 기본소득 역시
이 선별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노동 여부를 묻지 않았고,
성과를 요구하지 않았으며,
소득이나 능력으로 사람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무조건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그 의미를 다시 정의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아니라,
함께 유지되는 사회 안에서
자유가 지속될 수 있는 조건을
공동으로 책임지는 구조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 선택은
기존 이론과의 결별이었지만,
무조건성 자체에 대한 배신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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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책임의 재정의
무조건성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자유’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한국형 기본소득은
자유를 다른 방식으로 정의했습니다.
자유란
아무 책임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최소한의 기반이 모두에게 보장된 상태에서
각자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라는 인식이었습니다.
이 관점에서 책임은
자유의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유가 유지되기 위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형 기본소득은
개인에게 책임을 묻되,
그 책임을
노동이나 생산성으로 환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영역,
그러나 그동안 충분히 보상되지 않았던 영역을
책임의 이름으로 다시 불러냈습니다.
그 이름이
시민서비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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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 맞는 조건 설계
한국형 기본소득의 조건은
선별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더 많이 했는지,
누가 더 잘했는지,
누가 더 오래 했는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조건은 단 하나였습니다.
이 사회가 작동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역할을
모두가 한 번은 직접 경험하는 것.
병역,
돌봄,
요양,
의료,
환경,
안전,
재난 대응.
이미 누군가는 하고 있었지만,
대개 보이지 않았고
충분히 인정되지 않았던 영역들입니다.
시민서비스는
일을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집중된 시간으로 수행할 수도 있었고,
분절된 방식으로 나누어
삶의 흐름에 맞게 수행할 수도 있었습니다.
성과를 경쟁하지 않았고,
등급을 매기지 않았으며,
탈락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 조건은
평생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삶의 어느 한 시점에서,
한 번은 사회의 유지에
직접 참여하도록 설계된 구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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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서비스라는 새로운 무조건성
한국형 기본소득이 만든 조건성은
사실상 새로운 형태의 무조건성이었습니다.
누구나 대상이었고,
누구도 배제되지 않았으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 무조건성은
완전히 비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제도는
사람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왜 필요한가.”
“왜 일하지 않는가.”
“왜 도움이 필요한가.”
대신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사회가 유지되는 동안,
당신은 한 번이라도
그 유지에 직접 참여했는가.”
이 질문은
심문이 아니었고,
낙인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하는 방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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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기본소득은
무조건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무조건성을
‘아무 책임도 없는 자유’에서
‘모두가 책임을 나누는 자유’로
다시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이 재정의는
곧 하나의 구체적인 설계로 이어집니다.
그 책임은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어디에서 수행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