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무니 없는 꿈,

나의 음악활동의 시작은 언제일까

by 임미리


나의 음악 활동의 시작은 어디일까. 그것은 재수학원에 다닐 때 친했던 오빠가 자기 멋대로 신청해 버린 한 라디오 노래대회에서 시작되었다. 그 오빠는 짝사랑하던 언니에 대한 고민을 나에게 털어 놓곤 하면서 친해졌다.


우리는 수능시험 스트레스를 노래방 가서 자주 풀곤 했는데 고음노래나 재미있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공부에 쩔어 안경에 후드티를 입고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아직도 아이비의 “Cupido”를 부르며 ‘슈링 디라라라!’를 외쳤던 내가 떠오른다. 그때 노래방 아저씨가 노래 잘한다며 1시간씩 서비스 더 주시고 그랬던 기억이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대로 음악을 즐기며 논때였다.


아무튼 오빠가 이숙영의 파워 FM에 신청 하고, 경북 왜관읍이라는 촌에서 자란 내가 드디어 서울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 그것도 여의도 방송국에 말이다.

“와, 바다다!”

처음 본 한강은 마치 나에겐 바다 같이 넓어 보였다.


그렇게 라디오 대회에서 1위를 했다. 얼떨결이었다. 엄마가 녹음해서 자꾸 들려줬는데 들을 때 마다음 들어 보는 내 전파를 탄 목소리에 머리가 쭈뼛서며 닭살이 돋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못하기도 못했고 내 사투리는 또 왜이렇게 이상한건지. 아나운서는 멋지게 서울말을 하는데 말이야. 당시엔 그게 매력이 될 수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당시 방송전 리허설에서 기타를 치시던 분이 나에게

“조금만 더 연습하면 정말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하셨다. 나는 당시에 그 말이 너무 싫었다. 그 말은 지금 내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거였으니까. 그래서 본방송 대회에서 노래를 부르면서도 속으로는 무언가 부글부글 끓었다.

대체 어떻게 노래를 연습해야 한다는 말인가? 노래는 타고 나는 것이 아닌가? 기타리스트의 그 말이 답답함만 키워갔던 시절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당시에 사범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공부에만 정진하던 학생이었다. (물론 노래방은 갔지만) 읍에서 자라서 세상 물정도 모르고, 실용음악학과를 진학한 사람은 내 주변엔 없었다. 다들 공부해서 교대, 사대, 서울대 연대 고대를 꿈꾸던 애들뿐이었다.

음악을 하려면 학교 음악 시간에 배운 것처럼 성악을 해야 하는 건 줄 알았다. 진짜 고3때는 미쳐서 성악을 하겠다고 덤볐다가 수능에 망했고, 당연히 성악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재수를 하게 되었다.


다행히 나는 재수 후 홍대 사범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 하게 되었다. 라디오 대상 수상을 뒤로 한 채 교사로서의 꿈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상으로 탄 세부 여행권은 써보지도 못하고 버렸다. 아빠가 7살에 돌아가신 후 엄마랑 둘이 살았는데, 엄마랑 나는 여권도 없었으며 세부가 어딘지도 몰랐다. 해외여행은 무서웠고 그냥 안 가버렸다.


열심히 공부해 목표를 성취 했는데도, 나는 계속 음악 쪽으로 눈이 돌아갔다

그래서 당시 학교에서 흑인음악 동아리 브레인 스워즈라는 곳에 입단 하게 된다. 이것이 내 인생에 정말 큰 전환점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여전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시험이 끝나는 밤에는 클럽에서 밤새도록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같이 다닌 내 친구와 나는 키도 커서 하이힐을 신고 거인처럼 클럽에서 놀았다. 하이힐 신으면 키가 180이라, 이보다 작은 남자들도 많이 보였다.

클럽이라는 공간에도 익숙해지고, 동아리에서도 흑인음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음악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이 흑인음악 동아리는 훗날 역사적인 동아리가 되는데, 유명한 그레이, 로꼬가 내 동기, 후배였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의 특징은 정말 꾸준하게 계속 했다. 라는 것이다. (적어도 내 기억속엔) 흔들리지 않고.


멋진 후배들이 아직도 브레인스워즈를 이어나가고 있다 / 출처: 홍대신문



그러나 나는 흔들렸다.


내 전공은 오로지 선생님이 되는 것을 위한 교육학과였고, 과동기들도 그랬으니까. 음악은 탈출구이자 취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내가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왜냐면 나는 당시에 열등감 덩어리였기 때문이다.

로꼬나 그레이 같은 훌륭한 래퍼부터, 진짜 노래로 여기저기 우승한 실력자 친구들이 많았다. 나처럼 시골 촌뜨기가 이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알앤비도 많이 듣고, 나는 국내 가수 밖에 몰랐지만 그들은 해외 가수들을 두루두루 들으면서 영어발음도 좋았다. 내가 하는 영어는 사투리인지 영어인지 알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함께 하는 공연에서 내 실력은 형편 없었다. 따라서 나는 점점 내 가능성을 제한 했다. 나는 그래. 선생님이 될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건 그냥 취미인거야. 못해도 괜찮아.


그러나 그렇게 억압할수록 좌절과 우울은 커져갔다. 괜한 질투심과 열등감 때문에 동아리 활동 자체를 하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 였던 것 같다. 거기서 어떻게든 돋보이고 잘하고 싶은데. 난 잘 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노력도 안하면서 열등감만 컸던 정말 못난 나였던 것이다.

같은 동아리 다니던 동생이 노래를 정말 잘 했는데, 그 친구에게 하루는 어렵게 용기를 내 물어보았다.

“나한테 혹시 노래 가르쳐 줄 수 있어?”

돌아 오는 대답은 냉정했다.

“나도 어렵게 터득한건데...”

정확한진 모르겠지만, 거절이었다. 내 주변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에게 배워야 한다면 그게 그 친구라 생각했는데 너무 큰 좌절이었다.


정말 바보같았다. '학원'이나 '레슨'이라는 길을 왜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왠지 그런 곳의 힘을 빌리면 내 실력이 진짜가 아닌건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던걸까.


나는 그렇게 26살까지 방황하며, 결국은 선생님도 되지 못하고, 음악도 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집안은 엄마가 사기를 당해 파산했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위해 하루 3시간 자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무엇이 내 꿈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그런 삶을 오래도록 보냈다.


뭔가 계속 하고는 있었다. 심지어 부동산 공부까지 했다. 당연히 교생 실습도 나갔다. 10년이 지난 뒤에도 감사 편지를 받을 만큼 당시에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가르치는데 천부적인 재능이있었다. 내 지식이 5개 있다면 그것을 정말 어린 아이에게 까지도 5개를 모두 전달 할 수 있는 그런 능력.

그래서 교사라는 직업을 두고 큰 혼란을 겪었다. 전공이기도 하고, 잘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난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느 날 교실에서 일어난 깨달음 이었다.

한 남학생이 짖꿎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국어선생님이시죠?”

“응. 그런데 왜? 뭐 질문있니?”

“네. 선생님 '남자의 성기'는 조 밑에 무슨 받침을 써야 해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나는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런 성희롱적인 발언을 받을 것이라고 상상도 해 본적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 일 이후로 내 마음은 명확해 졌다.

‘나는 교사가 되지 않겠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훗날 내가 왜 이런 결론에 직감적으로 도달했는지 알았다. 어느 날 공연을 하는 도중에 취객이 와서 나를 희롱하려 하고, 관객이 무례하게 구는 일이 있었다. 그때 이상하게도

‘당신들이 아무리 무대 위에 있는 나를 성희롱 하거나 욕을 해도 나는 절대로 이 무대를 포기하지 않겠어.’

라는 내 마음의 울림이 있었다.

같은 사건을 두고 교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너무 쉽게 한 반면,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순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 보내 버렸으니까.

그러나 당시 교생활동을 하던 나는 교사가 내 길이 아닌 것은 알았지만 아직도 꿈이 무언지 몰랐다. 그냥 이런 취급을 당하고 교사로 살고 싶진 않다는 생각 뿐이었다. 좌절의 시간들이었다.

무언가. 무언가 텅 빈 인생이었다.


내 꿈은 무엇일까.


음악은 좋지만 실력이 없어서 터무니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꿈꾼 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그런 꿈.


지금 와서 보면 내 스스로에 대한 실력을 혼자 너무 저평가 했고, 내 가능성을 너무나 무시했었다. 혼자 열등감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라디오 노래대회에서 기타쳐준 분의 말을 마음속에 다시 떠올렸어야 했다.

‘조금만 노력하면 정말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의 본질을.


그것을 깨달은 것은 26살이 되어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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