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2019-09-23
신병교육때 부러진 손등뼈…제때 치료 못해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 악화
군 병원은 'CRPS 의심' 진단하고도 방치…전역 후 일상생활 불가
배상현씨의 뒤틀린 손가락
(서울=연합뉴스) 배상현(34)씨가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를 앓는 왼손의 붕대를 풀었을 때의 모습. 손가락이 뒤틀려 있고 손등에 수술 자국이 남아 있다. 2019.8.23 [배상현씨 제공]
(서울=연합뉴스) 권선미 기자 = '의무병에게 손의 통증을 계속 호소했지만 무시당했다', '먹은 것을 토해내는 주기가 식후 30분으로 짧아졌다', '부모님이 면회 오는 날, 간부들이 보기 안 좋으니 손에 착용한 스프린트(부목)를 풀고 부모님을 만나라고 했다'
배상현(34)씨가 군복무 시절 쓴 일기의 일부 내용이다. 배씨는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 환자다. CRPS는 골절 치료 후에도 통증이 계속되고, 작은 자극만 있어도 통증이 발생해 일상생활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희소병이다. 배씨는 군에서 부상당한 뒤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CRPS를 얻었다.
배씨는 지속적으로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는 왼손을 붕대로 동여매고 생활한다. 2015년 3월 CRPS 환자에게 마지막 수단이랄 수 있는 척수신경자극기 삽입 수술을 받았다. 이 장치를 쓰면 신경으로 가는 고통을 임의로 차단할 수 있지만, 사실상 '치료 불가'를 선언받는 셈이라고 한다.
23일 만난 배씨는 "척수신경자극기 삽입 수술을 받았을 때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고 느꼈다. 군대에 갔다는 죄명으로…"라고 말했다.
배씨는 하루 20∼30알의 약을 먹고, 말기암 환자에게 쓰는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한다. 통증이 극심할 땐 응급실에서 모르핀을 맞는다.
"인터뷰하려고 약을 많이 먹고 왔다"던 배씨는 말하는 도중 종종 이를 악물고 신음했다. 고통이 느껴질 땐 양손을 떨기도 했다.
◇ 신병교육 때 부러진 손등뼈…"훈련 빠지려 안달" 의무대도 안 보내
2011년 7월 31일 육군 모 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한 배씨는 2주 만에 왼쪽 손등뼈 골절상을 입었다. 훈련 준비 중 관물대 위에 있던 군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려 하자 이를 받으려다 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고통이 심해 의무병에게 의무대에 보내달라고 간청했지만 '사람 뼈는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훈련 빠지고 싶어 안달 났느냐'며 거절했어요. 손에 파스를 뿌리면서 훈련뿐 아니라 단체 기합까지 빠짐없이 받았죠. 손이 퉁퉁 붓더니 손가락이 뒤틀리기 시작했어요."
뒤늦게 의무대를 찾았다. 군의관은 "뼈가 부러졌는데 왜 이제야 왔느냐. 훈련은 참가하지 말라"고 했지만 훈련소 간부들이 열외를 허락하지 않았다.
배씨는 "음식을 삼키는 힘이 약해 평소 소식(小食)했는데, 잔반을 남기지 못하게 해 식사 후 구토하는 증상까지 생겼지만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1년 뒤 민간 병원에서 '루미네이션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음식을 먹은 뒤 구토하는 증상이다.
배상현씨의 체열검사 사진
(서울=연합뉴스) 배상현(34)씨의 체열검사 사진.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 증상이 나타나는 부위의 체온이 낮아 왼손과 오른손 손가락이 나타나지 않는다. 2019.8.23 [배상현씨 제공]
◇ 군의관 과실로 악화했는데 "수술경과 좋다"…'CRPS 의심' 진단에도 방치
배씨는 골절상을 입은 지 한 달여 뒤 국군강릉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집도한 군의관 실수로 수술 후 통증과 손가락 뒤틀림은 더 심해졌다. 그런데도 군의관은 "수술 경과가 좋다"고 했다.
"손에 물건이 닿으면 통증이 심하다"는 배씨의 말에 한 군의관은 CRPS가 발병했을 수 있다고 진단했지만,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고 한다.
이후 배씨는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옮겼다. "손을 건드리기만 해도 뼈가 으스러지는 듯이 아프다", "물이 닿을 때도 아프다", "무언가에 닿으면 아파서 잘 때도 깬다" 등 증상을 호소해도 적절한 검사나 치료는 받지 못했다.
국군수도통합병원 진료기록에는 의료진이 배씨에게 '이동 간 환부 외상으로 인한 충격 주의토록 설명함', '불편감 발현 시 격려', '손 씻기 격려함'과 같은 조치를 한 내역만 나온다.
군 병원에서는 더 이상의 수술을 포기했다. 2012년 3월 민간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뼈는 붙었지만, 통증과 손가락 뒤틀림은 호전되지 않았다.
재활 치료를 위해 국군대전병원을 찾았을 땐 군의관이 의병제대를 위한 수순인 의무조사를 권할 정도로 손의 상태가 악화돼 있었다. 하지만 국군수도통합병원은 "육군 규정에 이런 상태는 의무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배상현씨의 왼손
(서울=연합뉴스) 배상현(34)씨는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 증상이 심하게 나타나는 왼손을 붕대로 감고 생활한다. 2019.8.23 [배상현씨 제공]
◇ 의병제대도 못하고 만기전역…고통 시달리며 무너진 일상
2013년 3월 국군수도통합병원은 배씨에게 후유장해를 진단했다. 후유장해는 질병이나 상해, 산업재해 등을 치료한 뒤에도 완치되지 못하거나 이전과 같은 노동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후유장해 진단 후에야 의무조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이미 많은 시간을 써버린 뒤라 의병제대도 못한 채 2013년 4월 만기전역했다.
전역 후에는 지인의 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그러나 상태가 점점 악화해 업무 도중 응급실에 실려 가거나 기절하기도 했다. 학원을 그만두고는 집에서 누워있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극심한 통증 때문에 마약성 진통제에 의존했고, 약물 중독과 환각 증상이 나타났다.
"전투복을 입은 군인이 다가와 목을 조르거나 제 왼손을 꽉 움켜쥐면서 '군대에서 더 다쳤어야지 왜 이만큼만 다쳤냐', '군대에서 죽었어야지 왜 살아있냐'며 오른손을 칼로 긋는 환각을 보기도 했어요. 그럴 땐 오른팔에 자해한 상처가 남아 있었어요. 군인들이 자꾸 보여서 이제는 사람인지 환각인지도 알 수가 없어요."
배씨의 오른쪽 팔에는 긴 흉터가 여러 개 남아 있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배씨에게 우울증과 해리(解離) 증상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월 150만~200만원의 치료비를 감당하느라 가정이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워져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참게 된다"고 했다.
"군 입대가 제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려 놓을 줄 몰랐어요. 군에서 치료만 제대로 해줬더라면 제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매 순간 괴롭습니다. 군 입대를 후회하지 않도록 국가가 책임진다는 것을 보여줬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