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2019-09-24
입대 후 복합부위통증증후군 얻었는데도…국방부 "기각해야"
전문가 "공무수행 중 발병한 CRPS 국가에서 치료비 지원해야"
[연합뉴스TV 제공]
(서울=연합뉴스) 권선미 기자 = 군복무 당시 희소병을 얻은 피해자가 지난해 5월 서울중앙지법에 국가를 상대로 8천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입대 직후 입은 왼손 골절상을 제때 치료받지 못해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을 앓게 된 배상현(34)씨가 군 당국의 과실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제기한 소송이다.
CRPS는 신경계 및 근골격계 질환으로, 외상·골절이나 잘못된 수술 등이 원인이 돼 손상을 입은 부위에 극심한 통증이 지속하는 질환이다. 정신질환 등 또 다른 증상을 유발하기도 한다.
배씨는 "한 달에 150만∼200만원에 달하는 치료비가 들고, 2천만원짜리 척수신경자극기를 5년에 한 번 바꿔 달아야 한다"며 "평생 병이 낫기는 어렵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소송 상대인 국방부는 "청구 소멸시효가 지났다", "이중배상금지 규정에 해당한다"는 등 이유로 과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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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술 결과 좋지 않은 건 의료과실 아냐"
피고 측인 군 법무관들은 법원에 낸 답변서와 준비서면에서 "배씨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소멸시효가 끝났으므로 피고의 과실 여부와 무관하게 청구는 기각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현행법상 손해배상 청구권은 손해를 입은 사실과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가해행위가 있은 날로부터 5년이 지나면 시효가 경과해 소멸한다. 군 당국은 배씨의 의무조사가 통과돼 의병제대가 확정된 2013년 4월 9일을 원고에게 가장 유리하게 판단한 마지막 가해행위 일자로 봤다. 소송은 2018년 5월 제기했으므로 그보다 한 달여 전 5년 경과로 소멸시효가 지나 기각돼야 한다는 취지다.
이에 배씨 측은 "군인 등이 공상을 입은 경우 보상 여부가 판명되기까지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소멸시효가 경과하지 않은 것으로 본 대법원 판례가 있다"며 국방부 주장을 반박했다.
배씨 측은 "2016년 3월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 인정을 신청했고, 손배소를 제기했을 땐 보훈처에서 결과가 나오기 전이었다"며 "보상 여부가 판명되지 않았던 2년여간 소멸시효가 정지된 것"이라고 했다.
피고 측은 군 당국의 관리 부실을 지적하는 배씨 측의 여러 주장도 '근거가 없다'는 취지로 일축했다.
배씨를 의무대에 가지 못하게 하거나 훈련에서 열외시키지 않는 등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지적을 두고는 "주장만 있을 뿐 아무런 증거를 제출하지 못한다"고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소속 부대에는 관련 자료가 없고, 당시 부대에 있었던 간부들도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배씨는 군복무 당시 함께 근무했던 간부와 군 병원에서 자신을 지켜본 이의 증언을 증거로 제시했지만, 군 당국은 그들의 증언도 주장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해당 간부가 법원에 제출한 확인서를 보면 "'처음에는 (배씨의 수술 부위가) 잘 회복되고 있다'던 군의관이 갑자기 재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호전되지 않았다고 통보했다"며 "(배씨가)군 병원을 가면 꾀병이니 '군대 생활 하기 싫어서 그런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민간병원에서 수술받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다.
국방부는 소속 부대에서 진료 여건을 보장받지 못했다는 배씨의 주장에 대해서는 사단 의무대에서 진료를 받았으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아울러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는 군의관에게 의료 과실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배씨가 CRPS를 앓으면서 얻게 된 환각·환청 등 정신질환도 군의 과실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고 군 당국은 주장했다.
배씨는 "사단 의무대는 CRPS를 진단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추기는커녕 전문적인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라며 "군의관이 수술을 잘못했으면서 '회복되고 있다'고 해 병을 더 키운 게 의료 과실이 아니라면 제 탓이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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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상군경 지정됐으니 손해배상 안돼"
국방부는 배씨가 공상군경으로 인정돼 보상금을 받고 있다는 점을 들어 국가보상법상 이중배상금지 규정에 따라 소송을 기각해야 한다는 주장도 내놨다.
2014년 1월 배씨는 국가보훈처에 보훈보상대상자 인정을 신청했다. 수차례 기각된 끝에 2016년 재해부상군경 7급으로 인정받아 월 20만원가량을 받았다. 지난해부터는 국가유공자인 공상군경 6급(신경계통의 장애로 취업상 부분적으로 제한을 받는 자)으로 조정돼 월 110만원가량을 받는다.
해리 장애와 우울증, 루미네이션 증후군(음식을 먹은 뒤 구토하는 증상)은 보훈보상 항목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배씨 측은 "보훈처에 국가유공자 인정을 신청했을 때 뼈가 부러진 사고에 대해서만 CRPS 발병 원인으로 인정됐다"며 "이번 소송은 군에서 2년간 방치와 잘못된 수술 등으로 병을 키운 것과 그로 인해 나타난 우울증과 해리증상 등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활동이 불가능한 배씨는 공상군경으로 받는 월 110만원으론 생활비는커녕 치료비도 감당이 안 된다고 한다.
CRPS 환자는 극심한 통증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하지만, 정부는 감각 손실이나 통증에 의한 질병은 장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건강보험 적용 범위도 매우 좁다.
가톨릭대 은평성모병원 마취통증의학과 문성호 교수는 "15년 전 군의관 시절 병사들이 군대에서 작업 등을 하다 다친 뒤 CRPS가 발병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전문의를 갓 단 군의관들이 CRPS에 대한 이해가 없고 의무대부터 국군수도병원까지 가는 절차가 복잡해 치료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며 "지금도 환자들 중엔 이런 사례가 많아 군대가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낀다"고 했다.
그러면서 "CRPS 환자들의 통증 강도에 비해 보험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약성 진통제 범위가 매우 좁고, 외국의 신약(新藥)을 사용하려면 2주 분량 구입에 수백만원이 든다"며 "CRPS의 주 치료제인 항우울제와 항경련제도 보험 적용 범위가 좁고 CRPS 진단에 사용되는 적외선 체열진단, 땀 분비 검사 등도 보험 적용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문 교수는 "특히 군 복무 등 공무수행 중 CRPS가 발병한 경우라면 돈이 없어 병원 진료를 못 받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