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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oe 쏘에 Jun 20. 2020

내가 다른 건 줄게 없고, 김치 좀 담가줄까?

보리밥과 청양고추를 갈아서 만드는 여수식 초록 열무김치

파라과이에서 봉사단원으로 생활했던 초반, 나의 동료이자 친구였던 에베(Eve)는 가족 없이 머나먼 타국에서 혼자 사는 나를 많이 걱정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그녀의 집으로 데려가 파라과이 가정식으로 점심을 대접해주었다. “우리가 먹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더 올리면 되니 하나도 부담스러워할 것 없어.”라는 한국적인 말을 그녀에게서 들었다. 그녀의 엄마도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덕분에 솜씨 좋은 엄마가 만든 밀라네사(milanesa: 주로 비프커틀릿. 야채, 치킨 등 다른 재료로도 만듦), 보리보리(vori vori: 옥수수 가루와 치즈를 새알처럼 만들어 넣은 야채수프), 알본디가(albondiga: 고기완자), 깔도(caldo: 채소와 고기, 생선 등을 넣고 끓인 음식. 우리나라의 탕과 비슷함) 등 다양한 파라과이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남은 음식은 싸줘서 저녁까지 해결하도록 했다. 그 기간이 내가 요리해서 먹겠다고 선언(?)할 때까지, 거의 3개월이나 된다. 사랑받은 만큼 몸무게도 많이 늘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녀의 엄마는 내 엄마가 되어 주셨다.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치빠(chipa: 치즈 빵의 일종)나 베쥬(mbeju: 파라과이 전통 음식으로, 우리나라의 누룽지와 비슷함) 등의 요리법을 알려주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한국에 계신 엄마가 몹시 그리웠다. 나의 엄마도 "내가 다른 건 줄 게 없고, 김치 좀 담가 줄까?"라며 소중한 이들에게 김치를 선물처럼 주시는 분이었다. 파라과이 엄마의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한국 엄마의 음식이 너무 그리웠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 엄마 김치 하나만 있으면 더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김치 한 가지만 있어도 밥을 잘 먹을 정도로 김치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한 달 이하의 단기 여행에는 김치 없이도 문제가 없다. 워낙 여행을 좋아하고 타문화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 음식도 잘 먹는다. 하지만 타국에 오래 살아야 하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김치는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에는 다행히 한인 타운이 아주 잘 형성되어 있었다. 한국 물건과 식재료를 파는 상점도 있고 한식당도 많아서, 김치찌개 된장찌개는 물론 감자탕 치킨 짜장면도 먹을 수 있었다. 김치를 파는 곳도 많았다. 처음에는 김치를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김치를 사 먹어 봐도 엄마 김치와 비슷한 맛을 찾을 수 없었다. 아순시온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힘들게 김치를 사왔지만, 먹을수록 만족스럽지 않았다. 엄마 김치 특유의 깔끔하고 칼칼한 맛이 더욱 그리웠다.


어쩔 수 없이 지구 반대편에 계신 엄마의 도움을 받아 김치를 담가보기로 했다. 배추, 무, 고춧가루, 홍고추, 액젓, 새우젓, 매실액까지 구입해놓고 엄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 먹는 김치보다 훨씬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행복했다. 설탕 대신 배를 갈아 넣고, 멸치와 새우 다시마를 함께 우린 육수로 찹쌀 풀을 만드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엄마의 비법을 최대한 흉내 냈지만 엄마의 김치 맛을 구현할 수는 없었다. 파라과이에서 구할 수 없는 재료가 딱 한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수에 계시는 친할머니의 젓갈. 


할머니는 직접 젓갈을 담그고 정성스레 걸러서 보내주신다. 할머니의 젓갈과 엄마의 손맛이 만나 탄생한 김치 맛은 기가 막히다. 그중 내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여수식 초록 열무김치’이다. 이 김치는 파라과이의 특히 더웠던 날, 몹시 그리워했던 음식이다. 파라과이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었던 음식이었으니 더 그리울 수밖에 없었다.


초록 열무김치는 보리밥과 청양 고추를 갈아 만든 양념을 넣고 담근다. 흔히 생각하는 고춧가루나, 붉은 고추를 갈아 넣은 김치와는 조금 다르다. 한여름에 갓 담근 김치는 실온에서 살짝 익혀 냉장고에 넣어둔다. 냉기를 한껏 머금은 열무김치를 먹고 있으면 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뜨거운 라면에 차가운 초록 열무김치를 곁들여 먹으며 공포영화를 보곤 했었다. 친구 중에는 라면도 영화도 아닌, 초록 열무김치를 먹을 목적으로 오는 아이도 있었다. 이 김치는 그냥 먹어도, 밥에 고추장을 넣고 비벼 먹어도, 소면이나 냉면을 삶아 말아먹어도 맛있다.


올봄, 두 번째 해외봉사단원으로 임기를 마치고 콜롬비아에서 돌아왔다. 콜롬비아에는 에베 같은 현지 친구도, 엄마도 없었다. 배정받은 임지는 일 년 내내 덥기만 한 곳이어서 입맛을 잃고 체중도 많이 줄었다. 기운도 없었다. 시원하고 아삭한 열무김치가 간절했다. 그것 한입이면 입맛이 살고 힘날 것 같았지만, 구할 수 없었다. 콜롬비아에서도 배추김치 정도는 담가 먹을 수 있었지만 열무김치는 쉽지 않았다. ‘열무’라는 재료 자체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엄마의 열무김치를 그리워하다가 한국에 돌아온 후 몇 개월 남짓, 여름이 오는 기운을 느끼며 나는 이 김치 만드는 법을 꼭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음식을 배우겠다고 자진해서 엄마에게 달려가긴 처음이었다.


<초록 열무김치 요리법>

1. 싱싱한 열무와 총각무를 사서 다듬고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주 재료는 열무이나, 색감을 더하기 위해 하얀 총각무를 추가 사용한다.   

2. 자른 열무와 총각무를 소금물에 헹군 후, 굵은소금을 뿌려 두 시간 정도 절인다. 

    한 시간마다 뒤집어 가며 골고루 절인다.

3. 청양 고추와 양파를 믹서에 넣고 간다.

4. 보리밥을 질게 지어 식힌 후, 멸치 다시마 육수를 넣고 믹서로 간다.

5. 3과 4를 섞는다. 여기에 할머니표 멸치젓과 새우젓, 매실액, 파, 마늘을 넣어 김치 양념을 만든다.

6. 절여진 열무와 총각무를 물에 헹구고 물기를 뺀 후, 양념을 넣어 버무려 완성한다.

여수식 초록 열무김치는 오히려 배추김치보다 쉽고 간단했다. 직접 만든 김치를 한통 가득 싸들고 집에 왔다. 

하루 익혀 냉장고에 넣어두니 마음이 든든했다. 여름 더위를 이겨낼 수 있는 비책이 있으니…. 

엄마의 음식은, 특히 김치에는 나의 심신을 치유해주는 힘이 있다. 엄마의 김치 요리법을 장착해서 업그레이드 되었으니 다시 봉사활동을 나가도 문제가 없겠다.


그래도 한동안은 해외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한다. 매일 새벽잠에서 깬 엄마가 나를 위해 기도하시지 않도록…. 한국에서 엄마 요리법도 더 많이 배우고 엄마 곁에서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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